"서정이가 2002년 2월 20일 오후 2시에 태어났어요. 2020 도쿄 올림픽과도 인연이 있지 않을까요(웃음)."
여홍철(47) 경희대 교수는 영락없는 '딸 바보' 아빠였다. 두 번의 아시안게임 우승(1994·1998)과 올림픽 은메달(1996 애틀랜타). 체조 도마 종목의 전설에겐 최근 자랑이 하나 늘었다. 바로 둘째 딸 여서정(16·경기체고)이다. 딸은 아빠의 뒤를 따라 체조 선수의 길을 걷는다. 엄마 김채은(45)씨도 1994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동메달리스트(단체전)로 지금은 대한체조협회 전임지도자로 일한다.
유전자의 힘은 무섭다. 여서정은 지난 18일 열린 국가대표 선발전(아시안게임 대표 1차 선발전 겸)에서 언니들을 제치고 1위에 올랐다. 고등학생이 된 올해 처음 시니어 무대에 나서 이뤄낸 성과다.
최근 진천선수촌에서 여홍철·여서정 부녀를 만났다. 아빠가 입촌하는 딸을 데려다주는 길이었다. 초롱초롱한 눈과 둥그스름한 코…. 따로 소개하지 않아도 한눈에 부녀임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빼닮았다. 여홍철이 입을 열었다. "선수 때 지겹게 드나들던 선수촌인데… 은퇴하고도 이렇게 오게 될 줄 몰랐네요." 여서정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퍼졌다.
딸에게 체조는 운명처럼 다가왔다. 부모를 따라 체조장을 자주 오가면서 자연스럽게 동작을 배웠고, 곧잘 따라 했다고 한다. 여홍철은 "얼마나 고된 길인지 알기에 처음 운동하겠다고 했을 땐 말렸다. 하지만 끝까지 '하겠다'는 여덟 살 딸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여서정은 경기체중 시절, 3년 동안 전국소년체전에서 금메달 11개를 쓸어 담았다. 마냥 좋았던 건 아니다. '여홍철의 딸'이란 타이틀이 큰 부담이었다.
"제가 당연히 잘할 거로 생각하더라고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참 많이 노력했는데…."
아빠가 답을 이어갔다.
"색안경 끼고 보는 분들도 있었죠. 저도 서정이에게 '네가 확실히 잘해야 그런 소릴 듣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결국 실력으로 극복한 딸이 기특해요."
아빠의 딸 자랑이 이어졌다. "서정이가 초등학교 때 경기를 하는데, 채점하는 심판의 눈을 일일이 마주치며 웃는 거예요. 저는 그 나이 때 얼어서 어떻게 경기하는지도 몰랐는데…. 확실히 타고난 '끼'는 저보다 낫습니다." 여서정에게 아빠 여홍철은 롤모델이다. 그는 "긍정적 성격부터 체조 기술까지, 아빠를 많이 닮고 싶다"고 했다.
여서정의 주 종목은 여홍철과 같은 도마다. 탄력과 순발력을 타고난 그는 이미 국내 정상급 여자 도마 실력자다. 여서정은 최근 도마를 짚고 뛰어 공중에서 몸을 2바퀴 비트는 신기술을 연마 중이다. 연습 때 성공률은 50% 수준. 이 기술을 완벽히 구사하면 국제무대에서 메달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동작에서 반 바퀴를 더 비틀면(총 2바퀴 반), 아빠 여홍철이 자신의 이름을 붙여 만든 기술 '여2'가 된다. 여서정은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언젠가 아빠의 기술에 도전하고 싶다"고 했다. 여자 도마 높이(125㎝)는 남자(135㎝)보다 10㎝ 낮다. 여자 선수가 상대적으로 짧은 체공 시간을 극복해 '여2'를 시도하는 건 엄청난 도전인 셈이다.
하루 5시간 이상의 강훈련, 한창 자랄 나이에 체중 조절을 하는 딸이 아빠는 안쓰럽다. "먹고 싶은 게 많잖아요. 저도 그 나이 때 그랬지만…. 어느 순간 서정이가 스스로 절제하는 걸 보면 '많이 성숙했다'고 느끼면서 한편으론 마음이 안 좋아요." 딸은 씩씩하게 말했다. "요즘 아이스크림, 자장면이 특히 당겨요. 그래도 참으려고 노력하는데, 정말 먹고 싶을 땐 꾹꾹 참다가 아주 가끔 먹긴 해요."
여서정의 1차 목표는 오는 6월 2차 선발전을 거쳐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 나서는 것이다. 그다음엔 2020 올림픽이다. "큰 대회에서 메달을 따고 싶어요. 아빠가 못 이뤘던 올림픽 금메달이면 더 좋고요." 똑 닮은 아빠와 딸은 다가올 미래를 상상하며 함께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