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익명 게시판 운영자들이 더 이상 '익명 미투(Me Too·나도 당했다)' 제보 글을 게시하지 않거나 가려서 올리겠다는 뜻을 잇따라 밝히고 있다. 흔히 '대나무숲'이라 불리는 각 대학의 페이스북 익명 게시판은 '캠퍼스 미투' 폭로의 주된 창구 역할을 해 왔다. 그런데 운영자들이 내용의 진실성을 확인하기 어려운 제보는 올리지 않겠다고 나선 것이다. 한양대는 '미투' 관련 글을 게시하지 않기로 했다. 동국대와 성균관대도 근거가 불확실한 폭로는 자체 검열하기로 했다.
지난 18일 한양대의 '대나무숲'엔 "더 이상의 미투 관련 제보는 업로드(게시)하지 않는다"는 운영자 공지사항이 올라왔다. 운영자는 이 글에서 "한양대 대나무숲은 미투 운동을 지지한다"면서도 "(제보 내용의) 사실 확인이 어렵고, 특정 개인을 저격하거나 유추할 수 있는 제보는 지양하고 있다"고 했다. 보통 '대나무숲'은 이용자가 운영자에게 익명의 제보 글을 보내고 운영자가 이를 그대로 게시하는 방식이다. 이제부턴 운영자에게 미투 제보가 들어오더라도 게시하지 않겠다는 뜻을 공개적으로 밝힌 것이다.
지난 2일 동국대 '대나무숲' 운영자도 "미투 제보는 페이스북 메시지를 통해서만 받겠다"고 공지했다. 보통 제보자의 신원을 전혀 알 수가 없었는데, 미투 제보에 한해서는 페이스북 계정을 통해 제보자 신원이 어느 정도 확인돼야만 올리겠다는 말이다. "근거 없는 제보가 난무할 수 있기 때문에 최소한의 근거를 보장하기 위해서"가 이유였다.
최근 대학가 미투 폭로는 주로 대나무숲을 통해 나왔다. 이용자가 많고, 피해자들이 그곳에 댓글을 달면서 폭발력이 커진다. 이달 초 서울 명지전문대 대나무숲에 연극영상학과 교수들이 성추행을 일삼았다는 폭로 글이 이어져 해당 과 남성 교수진 5명이 경찰 수사를 받게 됐다. 이달 중순엔 한국외국어대 대나무숲에 한 교수의 성폭력을 폭로하는 글이 올라와 학교가 진상 파악에 나서자, 해당 교수가 극단적 선택을 했다. 22일엔 이화여대 음대 관현악과 교수가 학생 수십명을 성추행해 왔다는 글이 대나무숲에 올라왔다.
주로 익명 폭로 글이 올라오다 보니 가해자 신원을 놓고 각종 추측이 난무하기도 한다. 지난 19일 한국외국어대 대나무숲에 "저는 화요일 수업인 건강과 레포츠 수업 P 교수님께 폭행 및 성추행을 당했습니다"라는 글이 올라오자, 댓글로 "우리 들었던 그 과목 그 교수님이래" "이거 볼링이라는데 나 때랑 같은 교수님이야" 등 확인되지 않은 주장을 적었다. 엉뚱한 사람이 가해자로 지목될 위험이 있는 것이다.
이렇다 보니 대나무숲 운영자들이 '자체 검열'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성균관대 대나무숲 운영자는 22일 본지에 "가해자를 구체적으로 기술했으나 근거가 불명확한 경우나, 미투 (운동) 전반에 대해 여성주의로 편향된 글은 올리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대나무숲 운영자들이 미투 글 때문에 명예훼손의 당사자로 연루되는 일이 잦은 것도 '자체 검증 기준'을 내세우는 원인이다. 한양대 대나무숲 운영자는 "몇몇 게시 글로 인해 어떤 지기(운영자)는 소환돼 경찰 조사를 받기도 했다"며 "개인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제보자와) 마찬가지로 고소를 당하고 협박당했다"고 밝혔다. 실제 이 운영자는 지난 20일 기존에 게시된 미투 글을 삭제하며 "허위 사실 유포로 고소가 진행 중임이 확인됐다"고 했다. 동국대 대나무숲엔 '제보 내용의 모든 책임은 작성자에게 있으며 대나무숲은 어떤 책임도 없다'고 쓰여 있다.
일부 대학생은 이에 대해 "익명 소통 창구로서의 역할을 저버린 것"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한 이용자는 댓글로 "자체 필터링을 강화하며 미투조차 올라오지 못하는 대숲(대나무숲)이 된다면, 언젠가 대나무가 다 잘려나간 폐허가 될지 모른다"고 비유적으로 비판했다. 신광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사실 확인 권한이 없는) 대나무숲이 아닌 공공기관 등이 제보의 진위를 확인하고 공식적으로 문제 제기하는 방법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익명 게시판 '대나무숲'
'임금의 귀가 길다는 사실을 알게 된 신하가 혼자 속을 앓다가 아무도 없는 대나무숲에서 외쳤다'는 삼국유사의 일화에서 유래했다.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속내를 털어 놓는 공간이라는 뜻이다. 2012년쯤 출판업계 익명 게시판에 '대나무숲'이라는 이름이 먼저 붙었고, 이후 대학 등 다른 분야로 퍼진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