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는 몸을 단련하며 몸의 능력치를 키우고 그 한계와 쾌락을 경험하는 한 수단이다. 어쩌면 인간 무의식에 남은 수렵 본능의 한 발현일지도 모를 스포츠에 열광한 예술가는 드물지 않다. 헤밍웨이는 권투에, 프랑수아즈 사강은 스포츠카에, 무라카미 하루키는 마라톤에 열중하고, 카뮈와 윤동주는 청소년기에 축구의 매력에 푹 빠졌다. 카뮈는 "내가 아는 인간의 도덕과 의무에 대한 모든 것을 축구를 통해 배웠다"고 고백한 바 있다.
한국 근대미술사의 거장 이쾌대(李快大·1913~1965)는 1930년대 휘문고보 재학 시절, 야구 선수였다. 배트를 휘두르고 숨을 헐떡이며 베이스를 돌 때, 배트에 맞은 공이 경쾌한 타음과 함께 포물선을 그리며 까마득히 날아갈 때, 어쩌다 터진 '역전 만루홈런'에 짜릿한 기쁨을 느꼈을 테다. 일찍이 좌익 사상에 기운 그가 자본주의 체제에서 번성하는 야구에 몰입했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이쾌대의 그림을 처음 접한 게 언제인지 불분명하지만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의 어느 전시에 걸린 대작 '군상―해방고지'에 압도되어 '우리에게 이런 화가가 있었나?' 하고 화들짝 놀란 기억은 또렷하다. 특히 '두루마기 입은 자화상'의 서늘한 아름다움에 반해 화집을 구해 자주 들여다보곤 했다. 이쾌대는 월북 화가로 남쪽에서는 그림 자체가 금기시되다가 1988년 납·월북 작가의 해금 조치와 함께 뒤늦게 대중에게 알려졌다.
이쾌대는 경북 칠곡에서 토호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휘문고보를 거쳐 일본 도쿄의 제국미술대학에서 수학했다. 1941년 도쿄에서 이중섭, 문학수 등과 신미술가협회를 조직하고, 신미술가협회, 조선미술문화협회 등을 이끌었다. 6·25전쟁 중 서울에 남았다가 북한군의 선전 미술에 가담하고 거제도 국군 포로수용소에서 휴전을 맞는데, 1953년 포로 교환 때 자진해서 북한으로 넘어갔다. 북한에서 조선미술가동맹 화가로 활동하다가 1965년 2월 20일 자강도에서 53세로 세상을 떴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