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전 국내 한 대기업에 입사한 한누리(33·가명)씨는 재작년 사직서를 냈다. 상사와 동료들이 말렸지만 "건강이 안 좋아 쉬고 싶다"고 둘러댔다. 한씨는 이른바 명문대를 졸업하고 재수 끝에 원하던 회사에 들어갔다. 한씨는 "표면적인 퇴사 이유는 개인 사정이었지만 수년간 성희롱이나 성추행을 겪는 상황에 자괴감이 쌓인 상태였다"고 털어놨다. 그는 "술자리에서 상사가 허벅지를 만지거나 손깍지를 끼는 일이 비일비재했다"며 "스스로 '엉덩이나 가슴은 만져야 성추행이야'라고 다독였지만 그렇다고 성적 수치심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고 했다.
사회에 갓 나온 여성 사회 초년생들이 직장 내 성희롱·성폭력에 지쳐 떨어져 나가고 있다. 대개 퇴사 사유를 '일신상의 사유'라고 하기 때문에 잘 드러나지 않고 제 발로 걸어나간 것처럼 보인다. 여성가족부 성희롱 실태 조사에서 직장에서 성희롱을 당한 적이 있다고 답한 여성(9.6%) 중 78.4%가 '참고 넘어갔다'고 했다. 직장 여성의 7.5% 정도는 성희롱을 당하고도 참고 넘어갔다는 얘기다. 한국여성노동자회에 따르면 지난해 직장 내 성희롱 상담자 근속 연수는 3년 미만(72.7%)인 경우가 많아 연차가 낮은 젊은 여성이 직장 내 성희롱의 주 대상인 것으로 드러났다.
중소기업에 다녔던 김희지(28·가명)씨는 같이 술을 먹자며 추근대는 거래처 사람에게 거절을 했더니 "그 얼굴에 좀 나긋나긋하게 굴라" "나이 먹으면 그런 말도 안 한다. 고마운 줄 알아라"는 동료들의 핀잔이 이어졌다. 김씨는 "문제를 제기해도 동료들이 공감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사표를 냈다"고 했다.
어렵사리 직장에 고충을 호소하거나 조치를 취해달라고 요구한 후에도 경력에 대한 고민은 피해자의 몫이다. 입사 4년 차 직장인 임주연(가명)씨는 스물다섯 살 차이 나는 직속 상사의 성희롱으로 괴로운 날들을 보냈다. 새벽에 전화를 해 "집에 혼자 있냐"고 묻거나 "강아지를 보았는데 너처럼 귀엽다"고 말하는 등 직원이 아닌 여자로 보는 듯한 느낌이 불쾌했다고 한다. 참다못한 임씨가 회사에 고충을 호소했더니 지방 발령이 났다. 6개월 만에 임씨가 서울 본사로 왔을 때 사건은 이미 잊혔다.
장명선 이화여대 젠더법학연구소 교수는 "직장 내 성폭력을 신고할 제도가 있어도 2차 피해를 두려워해 혼자 속앓이하는 사회 초년생들이 많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