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인→사과→돌파→후퇴.
지난 5일 비서 성폭행 의혹이 제기된 이후 안희정(53) 충남지사 측의 공식 입장은 이렇게 변화했다. 8일 갑자기 기자회견을 취소한 건 마지막 '후퇴'에 해당한다. 안 전 지사는 지난 나흘간 측근들과 함께 대책을 논의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안 지사에게 남은 행보는 무엇이 있을까.

지난해 12월 안희정 당시 충남지사가 송년 기자회견을 하기 위해 도청 회의실로 들어서는 모습. 왼쪽은 안 전 지사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밝힌 김지은 정무비서.

① 부인(否認)
"안 지사의 수행비서로 활동하며 지난해 6월부터 8개월 동안 4차례 성폭행당했다." 안 전 지사의 정무비서였던 김지은(33)씨는 지난 5일 오후 9시쯤 한 방송국에 직접 나와 이렇게 폭로했다. 안 전 지사 비서실은 보도한 방송사에 " 합의에 의한 성관계였고 강압이나 폭력은 없었다"고 해명했다. '성관계는 인정하지만, 성폭행은 아니다'는 부인(否認)이었다.
그동안 미투 폭로가 터지자 이윤택·김기덕 등 성폭행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합의된 성관계'라는 입장을 내놨다. 왜 이들은 일관되게 '합의된 성관계'를 주장할까?
최진녕 법무법인 이경 변호사는 "'합의된 성관계'였다는 말은 '나는 적어도 형법적으로는 무죄'라는 주장과 같은 말로 해석된다"고 말했다. 더구나 안 전 지사는 배우자가 있는 기혼(旣婚)자다. 과거 기혼자가 다른 이성과 성관계를 하는 '화간(和姦)'을 하면 간통죄로 처벌 받았다. 하지만 지난 2015년 헌법재판소가 간통죄를 위헌 판결을 내리면서, 간통죄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 때문에 안 전 지사가 주장하는 것처럼 김씨와의 성관계가 합의된 것이라면 형법(刑法)상으로는 무죄가 될 여지가 있다. 또 '합의된 성관계'는 폭행이나 협박이 없었고, 권력·위계를 이용한 성관계가 아니라는 뉘앙스도 줄 수 있다. 불륜을 저질렀다는 도덕적 비난은 받겠지만 최소한 극악(極惡)한 강간범은 아니라는 점을 내세우겠다는 심리라는 분석이다.

② 사과(謝過)
안 전 지사는 6일 새벽 1시,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공식 '사과'문을 발표했다. 그는 "합의에 의한 관계였다는 비서실의 입장은 잘못"이라며 "저의 어리석은 행동에 대해 용서를 구한다. 모두 다 제 잘못"이라고 했다.
안 전 지사의 발언은 언뜻 성폭행 의혹을 인정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합의에 의한 관계였다는 비서실의 입장은 잘못'이라는 문장은 여러 해석을 낳을 수 있다. ①합의된 성관계가 아니었다.(성폭행이 맞다) ②(성폭행은 아니었지만) 비서실의 입장 발표 방식이 잘못됐다. 내가 직접 챙겼어야 했다. ③ 내 의견이 아니고 비서실이 마음대로 발표했다 등 크게 3가지로 나뉠 수 있다. '어리석은 행동'이라는 표현도 성폭행을 인정한다는 것인지, 단지 부적절한 관계였다는 것인지 모호하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안 전 지사의 발언은 해석이 갈린다. 전별 법률사무소 동일 변호사는 "안 전 지사가 위력에 의한 성폭력을 인정한 셈"이라며 "최대한 협조하고 반성하는 기미를 보이면 형이 줄어들 수 있기 때문에 이를 노린 것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반면 송혜미 법률사무소 현율 변호사는 "유부남인데 아내가 아닌 다른 여성과 성관계를 가졌다는 점을 사과한다는 것으로 보인다"며 "법적으로 불리할 만한 발언은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일체의 정치 활동도 중단하겠다"는 발언에도 '복선'(伏線)이 깔려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오윤성 순천향대 경찰행정학과 교수(프로파일러)는 "안 전 지사는 사과글을 올리면서 어떤 용어를 사용할지 상당히 고민한 것으로 보인다"며 "정계 '은퇴'가 아니라 정치 활동을 '중단'하겠다는 단어를 사용한 점을 보면 추후 정계로 복귀하겠다는 가능성을 남긴 것"이라고 했다.

③ 돌파(突破)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지난해 12월 18일 도청 대회의실에서 송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안 전 지사 측은 폭로 이틀 뒤인 7일엔 "8일 오후 3시 충남도청 브리핑룸에서 국민, 도민분들께 사죄의 말씀을 올리겠다"고 밝혔다. 공식 기자회견을 통해 현 상황을 정면돌파하겠다는 전략으로 해석됐다. 특히 김지은씨가 "다른 피해자들도 있다"고 밝힌 만큼 공세적인 입장 발표로 '추가 폭로'를 막겠다는 의도도 포함됐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안 전 지사는 두 번째 피해자가 나올 수도 있다고 예상하고 먼저 방어하려고 한 것 같다"며 "기자회견이 진행됐다면 자기방어적인 기자회견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이웅혁 건국대 경찰학과 교수도 "추가 피해자들이 '폭로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게끔 감정에 호소했을 가능성이 있다"며 "일단 국민에게 용서를 구하는 동시에 또 한편으로는 추가 피해자가 나올 것을 사전에 막아보겠다는 의미"라고 분석했다.

④ 후퇴(後退)
안 전 지사는 8일 다시 한번 입장을 바꿨다. 전날 밤 두번째 피해자가 등장하면서 안 전 지사는 예정된 기자회견을 취소했다. 그러면서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검찰에 출석해 수사에 성실하게 협조하는 것이 국민 앞에 속죄드리는 우선적 의무"라며 "검찰은 한시라도 빨리 저를 소환해 달라. 성실하게 임하겠다"라고 했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기자회견이 열릴 예정이었던 충남도청 1층 로비. 취재진들이 기자회견 취소 연락을 받고 철수하고 있다.

한시라도 빨리 소환해 달라는 말에는 안 전 지사의 쇼맨십이 담겨 있다는 분석이다. 오윤성 교수는 "어차피 검찰에 불려갈 텐데, 사람들에게는 스스로 들어가는 것처럼 보여지도록 '빨리 불러달라'고 말한 것"이라며 "이를 비춰보면 안희정은 쇼맨십이 강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이웅혁 교수는 "추가 피해자가 나오면서 부담감을 느낀 것 같다"며 "회피하고 도망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면 메시지를 보내긴 보내야 하는데, 그럴 거리가 궁색하니까 검찰에 빨리 조사받겠다는 말 정도를 한 것"이라고 했다.
일각에서는 아직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수정 교수는 "정말 결백하지 않은 이상 범죄 혐의를 받고 있는 자가 당당하게 하루빨리 법원에 가자고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며 "아직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