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례 통해 본 안 지사 성폭행 사건
물증 적고 피해자∙주변인 증언 뿐
위력, 性 결정권 침해 여부가 핵심

"제가 증거이고, 모두 기억 속에 있다.”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가 자신을 성폭행했다고 폭로한 충남도 정무비서 김지은(33)씨는 지난 5일 JTBC에 출연해 법적 대응을 예고하며 이 같이 말했다. 김씨는 "안 지사의 수행비서를 맡은 지난해 6월 말부터 8개월 동안 네 차례의 성폭행과 함께 수시로 성추행을 당했다"며 "제가 지사와 있었던 일들을 모두 다 얘기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이날 뒷받침 할만한 여러 증언을 했지만 물증은 따로 확보해 두지 않은 듯 했다.

현재까지 드러난 이 사건의 증거는 안 전 지사와 나눈 텔레그램 메시지를 캡쳐한 일부, 그리고 피해 당시 도움을 요청했던 주변인과 피해 당사자인 김씨의 증언(인증) 등이다. 안 전 지사는 지난 6일 새벽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합의에 의한 관계였다는 비서실의 입장은 잘못”이라며 “모두가 제 잘못이고, 오늘부로 도지사직을 내려놓고 일체의 정치 활동을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사실상 성관계가 있었음을 인정했으나, 위력이나 강압에 의한 성폭행을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이런 경우 법원은 위력에 의한 간음을 어떻게 판단할까.

강간죄 관련 판례에 따르면 명확한 물증이 없을 때 △피해자와 가해자 각각의 증언 구체성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의 관계 △성관계 당시의 외부적 환경적 요인 △피해 여성의 기질적 요인으로 인한 가해자의 폭행 협박에 대한 인식 등이 고려된다.

한 고등법원 판사는 “위력에 의한 간음의 경우, 가해자의 입장에서는 자신은 그리 심한 유형력을 행사한 것도 아닌데 피해자가 순응한 것은 피해자가 성관계를 동의한 게 아니냐고 오해해서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며 “이 경우 성관계 역시 여성 입장에서는 비동의적 성적 의사결정권의 침해로 인식하고, 반대로 남성에서는 여성의 의도를 오해하고 동의에 의한 성관계로 인식할 수 있는데 강간죄로 처벌할 수 있느냐는 점은 매번 다투는 쟁점”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가해자의 유형력 내용과 정도에 대해서는 가해 남성의 입장이나 일반인의 제 3자적 시각보다 피해 여성이 인식할 수 있었던 구체적 상황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이 국민의 법감정에도 맞는 판결”이라며 “그러나 이 경우 피해 여성의 진술이 객관적 증거에 부합하는지, 일관되는지 여부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김씨에 따르면 안 전 지사는 ‘미투’ 폭로가 이어지던 지난 2월 25일에도 성폭력을 저질렀다. 김씨는 당시 안 지사가 불러 “‘미투를 보며 너에게 상처가 됐다는 걸 알게 됐다’, ‘미안하다’, ‘괜찮았느냐’ 묻고는 그날도 그러시더라(성폭행)”고 말했다.

피해자 김지은씨에 따르면 안희정 지사는 성폭행 후 김씨에게 ‘텔레그램’을 통해 ‘괘념치 말거라’ 등의 문자를 보냈다.

김씨는 "인터뷰 전 안 지사 본인과 주변들에게 연락이 수없이 왔다"는 사실도 밝혔다.
그는 "안 지사가 '너를 가져서 미안하다', '상처줘서 미안하다', '부끄러운 짓을 했다'고 구두로 전했다"며 "(5일) 이전에는 계속해서 미안하다, 괜찮느냐고 안 지사에게 연락이 왔었지만 오늘 전화는 받지 않았다"고 했다.

법조계에서는 김씨가 증언한 안 전 지사의 발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안 전 지사 역시 김씨 내심에 반하는 성관계를 맺은 사실을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물론 안 전 지사가 이 같은 발언을 한 사실이 있음을 인정해야 증명력을 얻는다.

이 밖에 두 사람이 이용한 메신저 프로그램 ‘텔레그램’ 등에 남은 대화 부분, 즉 안 전 지사가 성폭행 후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김씨에게 ‘미안’, ‘내가 스스로 감내해야 할 문제를 괜히 이야기했다’, ‘괘념치 말라’ 등의 내용을 보낸 것은 안 전 지사에게 불리한 증거다.

최근 법원의 판례에는 위력에 의한 간음, 비동의 간음 등 입증이 어려운 혐의에 대해서도 유죄가 선고되는 경향이 뚜렷하다.

작년 3월 전북 전주에서 DVD방을 운영하는 한 사업자가 19세 아르바이트생에게 맥주에 체음제를 넣은 뒤 피해 여성의 의식이 혼미한 상태에서 성폭행을 했다. 피해 여성의 기억은 비교적 뚜렷하지 않았으나, 1심 재판부는 “근로자 입장에서는 고용주와의 사이가 대등하다고 볼 수 없다”며 위력에 의한 간음인 점을 인정하고 유죄를 선고했다.

앞서 2014년 이태원에서 두명의 외국인 남성이 한국인 여성을 강간한 사건에서 서울고법은 “사회문화적 지위와 도덕적 관념, 성관계까지의 경과, 당사자들의 친분 면식관계 등에 비춰 피해 여성이 성관계를 허락하기 어려운 유형의 성관계라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대체로 성관계를 거부할 것이라는 인식을 하는 것이 옳다”고 봤다.

재판부는 이어 “피해 여성의 적극적 동의를 얻지 못한 채 내심으로 여전히 거부 입장이 분명함에도 반항이 억압된 채 마지못해 성관계에 순응하고 있는 피해자의 태도를 동의한다고 간주하고 비전형적, 일탈적 성관계에 돌입한 경우라면 가해자들이 피해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가 있음을 알고 있거나 적어도 미필적으로나마 이를 알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라며 유죄를 선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