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4년 5월 6일. 영국 옥스퍼드대학교 트랙 경기장에 긴장감이 흘렀다. 1200여명의 관중들은 한 선수의 기록 발표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록은…” 장내 아나운서는 잠시 말을 멈춘뒤 다시 입을 열었다. “3분…” 경기장은 격렬한 함성과 흥분으로 가득찼다고 영국 ‘더 타임스’는 전했다. 정확한 기록은 3분 59.4초였다. 역사상 최초로 1마일(1.6㎞) 달리기에서 ‘마의 4분’ 벽을 깬 순간이었다.

기록의 주인공은 영국 아마추어 체육인 협회(AAA) 소속의 로저 배니스터. 배니스터는 “내가 뛰어넘은 것은 정신력의 한계다. 4분 기록을 깨는 것은 에베레스트 정복처럼 인간의 정신력에 도전하는 것이었다”고 고백했다. 그가 기록을 낸 뒤 한달만에 10명이 4분 이내 기록을 달성해, 배니스터는 육상 선수들의 심리적 장벽을 깼다는 평가를 받았다.

2018년 3월 3일(현지 시각) 로저 배니스터가 88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배니스터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육상 선수이자, 저명한 의사였다. 사람들은 그를 두고 ‘육상 전설’ ‘선구자’ ‘영국 스포츠의 아이콘’으로 평했다. 배니스터는 1970년대엔 반도핑 테스트를 위한 스테로이드 1차 검사 방법을 개발하기도 했다.

로저 배니스터가 1954년 5월 6일 1마일 경주 결승선을 1위로 통과하고 있다.

◇ 전력질주로 등교하던 소년, 육상 선수 꿈 키워

배니스터는 1929년 3월 23일 영국 미들섹스 해로우에서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 유년기를 보냈던 집은 트랙 경기장이 있는 공립학교 근처에 있었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배니스터의 가족은 배스(Bath) 지역으로 이사했다. 배니스터는 집에서 학교까지 매일 전력질주 했다. 그는 곧 학교 크로스컨트리(cross-country) 달리기 대회에서 신기록을 세웠다. 배니스터는 “나의 달리기 능력은 선물처럼 내게 왔다. 그것은 마법같았다”고 말했다.

1944년 전쟁이 끝난 뒤 배니스터의 가족은 런던으로 거처를 옮겼다. 배니스터는 햄스테드에 있는 유니버시티 칼리지 스쿨에 진학했다. 배니스터의 아버지는 달리기를 좋아하는 배니스터와 함께 1945년 웨스트런던 화이트시티 경기장에서 열린 1마일 경주를 보러 갔다. 배니스터는 후에 “그때 나는 마일러(miler· 1마일 경주 선수)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회상했다.

젊은 시절의 로저 배니스터.

배니스터는 17세에 옥스퍼드 엑스터 칼리지 의대에 입학한 뒤 육상 클럽에 가입했다. 배니스터는 옥스퍼드대와 캠브리지대의 20야드(18.288m) 경주에 세번째 선수로 출전해 우승했다. 그는 런던올림픽 선수 후보에 물망에 오르기도 했지만, 나이 제한으로 출전은 무산됐다.

이후 대학교 육상 클럽 회장에 선출된 배니스터는 코치진 없이 혼자서 훈련을 계속했다. 배니스터는 1950년 런던 세인트메리 병원에서 수련의 과정을 밟기 시작했고, 동시에 기록 단축을 위해 차별화된 훈련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강점인 의학적 지식을 달리기에 적용했고, 오랜 연구 끝에 1마일을 네 구간으로 나눠 뛰는 훈련 방법을 찾아냈다. 전력 질주를 한 뒤 2분 간 천천히 뛰는 것을 반복하는 방법이었다. 언론은 코치진 없이 훈련하는 배니스터를 ‘고독한 늑대 마일러’라고 불렀다.

◇ 사상 최초로 ‘마의 4분’ 벽 넘어서…“심리적 장벽이었을 뿐”

배니스터는 새로운 목표를 세운다. 그는 모든 육상 선수들이 꿈으로만 여겼던 ‘4분’의 벽을 넘어서겠다고 다짐했다. 2년간 훈련은 계속됐다. 기록은 점차 단축됐다. 배니스터는 1953년 5월 출전한 1마일 경주에서 4분 3.6초를 기록했다. 영국 신기록이었다. 그 직후 출전한 경기에서는 4분 2초를 뛰었다. 역사상 세번째로 빠른 기록이었다.

그해 가을, 혼자서 하는 훈련에 한계를 느낀 배니스터는 코치, 동료들과 함께 훈련하기 시작한다. 훈련 강도는 높아졌다. 배니스터는 당시 훈련은 “미친듯한 일이었다”고 했다.

1954년 5월 6일. 25세가 된 배니스터와 그의 동료들은 옥스퍼드대 육상팀과 1마일 경기에 출전했다. 경기 당일은 바람이 많이 불고 습한 날씨였다. 기록을 내기에는 이상적이지 못한 환경이었다. 그러나 배니스터는 도전하기로 결정한다. 그는 자신의 훈련 방법대로 뛰었다. 결승선을 210m를 남겨놓고 막판 스퍼트를 낸 배니스터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최초로 마의 4분을 깨뜨린 선수가 됐다.

배니스터가 4분 기록은 깬 것은 단순한 의미가 아니었다. 그가 기록을 낸 뒤 한달만에 10명이 4분 기록을 깼고, 1년 뒤엔 37명, 2년 뒤에는 300여명이 배니스터의 기록을 넘어섰다. BBC에 따르면 배니스터는 “4분의 벽은 심리적 장벽이었을 뿐, 실제 육체적인 장벽은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배니스터가 깬 것은 전 세계 육상 선수의 심리적 장벽이었던 것이다. 현재 1마일 경주 세계 최고 기록은 히참 엘 게루지(모로코)가 1999년 7월 7일 로마에서 세운 3분 43.13초다.

◇ 스포츠·의학계서 명성 쌓아…교통사고, 파킨슨병 시련도 잇따라

배니스터는 4분 기록을 깬 경기 다음날, 화가였던 모이라 제이콥슨을 만났고, 그와 이듬해 결혼했다. 배니스터는 1954년 12월 육상계를 은퇴했다. 그는 본업으로 복귀했다. 그는 “좋은 달리기 선수가 되기 위해 인생의 나머지를 지루하게 만들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배니스터는 그후 10년간 의학 연구에 몰두했고, 신경학 분야 대가로 인정받았다.

2012년 로저 배니스터가 자신이 4분 기록을 깼던 경기장에서 런던올림픽 성화를 봉송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삶에서 스포츠는 항상 함께였다. 배니스터는 1971~1974년 스포츠 시설 건설·유지 단체인 영국 스포츠위원회(British Sports Council) 회장을 역임했다. 배니스터는 당시 반도핑 테스트를 위한 스테로이드 1차 검사 방법을 개발해냈다. 1975년에는 기사 작위를 받았다. 1976~1983년까지는 스포츠와 체육 연구를 장려하는 국제스포츠체육협의회 회장을 맡았다. 2012년엔 런던올림픽 성화 봉송자로 등장하기도 했다.

본업에서도 명성을 쌓아갔다. 배니스터는 1985~1993년까지 옥스퍼스대학 펨브로크칼리지 총장직을 맡았다. 2005년 미국신경학회(AAN)에서 공로상을 수상했고, 2012년에는 신경계 질환 관련 교과서 편집에 참여했다.

배니스터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그는 1975년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오른쪽 발목이 산산조각났다. 다시는 뛸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는 이후 집에서는 목발을 사용하고, 야외 활동시에는 휠체어에 몸을 맡겼다. 그는 2011년 파킨슨병 진단을 받았다. 파킨슨병은 알츠하이머, 치매 다음으로 가장 흔한 퇴행 뇌질환이다. 배니스터는 이 사실을 공개하면서 “신경학자인 내가 파킨슨병에 걸린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이는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타임지는 당시 그가 매우 담담했으며, 자기 연민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고 전했다.

◇ ‘영국 스포츠 아이콘’ 88세 나이로 사망…애도 물결 이어져

배니스터는 지난해 신년 훈장 수여식에서 최고 등급인 컴패니언 훈장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지난 3월 3일 8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가족들은 배니스터가 마음의 고향인 옥스퍼드에서 편안히 눈을 감았다고 4일 밝혔다. 배니스터의 모교 사랑은 각별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자신의 트로피를 학교에 기부하기도 했다.

테리사 메이(위) 영국 총리와 제시카 에니스(아래) 영국 육상선수가 2018년 3월 4일 로저 배니스터의 죽음에 애도를 표하고 있다.

BBC, 가디언, 뉴욕타임스 등 외신은 이날 배니스터의 죽음을 전하면서 그를 ‘육상 전설’ ‘선구자’ ‘위대한 신경학 전문의’로 묘사했다.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는 이날 트위터에 “로저 배니스터 경은 위대한 영국 스포츠의 아이콘이었다. 그의 업적은 우리 모두에게 영감을 줬다. 그를 매우 그리워 할 것”이라고 썼다. 제레미 코빈 영국 노동당 당수는 “4분의 벽을 뚫고 나아간 그의 행동과 결단은 우리 모두에게 영감이 됐다”고 했다.

스포츠 스타들도 배니스터의 죽음에 애도를 표했다. 올림픽 육상 경기 메달리스트인 영국의 제시카 에니스 선수도 “배니스터 경은 영국 스포츠 정신의 개척자였다. 그는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영국 마라톤선수인 폴라 래드클리프는 “선구자 중 하나를 잃었다는 소식에 너무 슬프다. 배니스터 경은 인간에 한계가 없음을 보여줬다”고 말했다. 소말리아 출신의 영국 육상선수인 모하메드 파라는 “배니스터는 항상 겸손하고 지적이며 용기를 북돋아주는 사람이었다. 그는 가족과 친구들의 마음 속에 함께할 것”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