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비를 집행할 때 두 번, 세 번 점검합니다. 공익 목적에 맞는 활동인지, 혹시나 흠잡힐 일은 없는지 더욱 조심하게 됩니다."
최근 대기업 소유 및 관련 공익재단(이하 기업재단)들의 고민이 깊어졌다. 공정거래위원회(이하 공정위)와 국세청이 기업재단을 향한 칼을 뽑아 들었기 때문. 지난해 11월 5대 그룹 CEO와 만난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은 "대기업 소속 공익재단이 설립 취지에 부합하는 활동을 하고 있는지 들여다보겠다"며 전수조사에 돌입, 오는 3월까지 51개 기업집단 소속 171개 법인으로부터 자료를 제출받아 상반기 내에 개선 방안을 발표한다. 국세청은 국세행정개혁TF까지 꾸려 엄중한 검증을 예고했다. 전문가들은 "과거 경영권 편법 승계 문제가 공격 대상이었다면, 이젠 출연재산을 공익 목적에 맞게 투명하게 집행했는지 모니터링이 강화되고 있다"면서 패러다임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더나은미래는 대기업 및 관계사와 오너가 출자한 자산액 상위 20개 공익재단의 임팩트(사회문제 해결) 및 투명성을 분석했다.
정부 책정 환경, 문화·체육, 외교·통일 예산보다 많아
삼성·현대·LG·두산 등 주요 그룹 및 오너가 출연한 공익재단 상위 20곳의 총자산은 약 9조3571억원(2016년 국세청 공시 기준). 2018년 정부가 책정한 환경(6조9000억원), 문화·체육(6조5000억원), 외교·통일(4조7000억원) 총예산보다 큰 규모다. 더나은미래가 자산액 상위 20개 기업재단의 주요 사업 60건(재단별 예산 지출액 상위 3개 프로그램)을 분석한 결과, 87%(52건)가 '교육 불평등(43.5%)' 및 '삶의 질 저하(43.5%)' 문제 해결에 치중돼 있었다. 청년 취업·일자리 창출 등 '노동 불안정' 해소를 위한 사업은 1건, 환경 관련 사업은 0건이었다. 특히 노인 소외, 정서 불안, 부족한 복지, 질 낮은 보육, 문화 격차 등을 포괄하는 '삶의 질 저하' 문제 중에선 '문화 격차 해소(65%)'를 위한 사업과 취약 계층을 위한 '복지(35%)' 지원이 전부였다. 정부 부처를 움직일 만한 기업재단의 자산이 특정 사회문제 해결에 편중돼 있는 것. 프로그램의 다양성을 꾀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전체 사업의 65%가 생계비 및 교육비(장학금)·문화예술 체험·연구비 등 수혜자에게 자금을 지원하는 단순 사업에 그쳤고, 전문성 있는 별도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경우는 25%에 불과했다. 박태규 연세대 명예교수는 "미국의 빌게이츠재단과 록펠러재단은 아프리카 식량 문제 해결을 위한 NGO '녹색혁명동맹(AGRA)'을 공동 설립해 협력하고, 포드재단은 거액의 정책 연구 지원금을 통해 국가 정책 대안을 함께 고민한다"면서 "국내 기업재단들도 쉽고 단순한 사업만 하려는 모습을 버리고, 어떤 사회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지 명확한 목표를 설정하고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 현대차정몽구재단 재무 보고서 항목 X→O로 수정
삼성생명공익재단 목적사업비 지출 0.9% 최저
기업재단이 공익 목적에 맞게 예산을 집행하는지 감시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2016년 기준 상위 20대 기업재단의 목적사업비 평균은 전체 지출의 67%로 전년 대비 1.54% 감소한 모습을 보였다. 재단의 고유 설립 목적에 부합하는 지출이 오히려 줄어든 것. 특히 자본금 1위(약 2조1068억원)인 삼성생명공익재단의 목적사업비 지출은 0.9%로 가장 낮았다. 수익 사업에 해당하는 삼성서울병원 운영에 90% 이상 지출하고 있기 때문. 반면 상위 20개 기업재단 중 삼성생명공익재단과 같은 사회복지법인의 목적사업비 평균 지출은 83%로 약 90배 격차를 보였다. 자산 2위(1조9513억원)인 아산사회복지재단 역시 아산병원 운영 지원(수익 사업) 비중이 높아 목적 사업 비율이 0.9%에 불과했고, 2015년 GS그룹 오너 일가가 세운 사회복지법인 '동행복지재단'도 취약 계층 지원을 위한 목적 사업에 4.5%만 지출했다. 전년 대비 목적사업비 지출 증가 폭이 가장 큰 곳은 '신한장학재단(96.9%, △10%)', 하락 폭이 가장 큰 곳은 태광그룹 9개사가 설립한 '세화예술문화재단(67.4%, ▽25.5%)'으로 나타났다.
출연재산(원금)을 쌓아두고 정작 사회공헌 사업엔 소극적이란 지적도 있다. 과거 공익법인은 기본 재산(원금)은 보존하고 투자 수익으로만 사회공헌 활동을 할 수 있었지만, 2016년 19대 국회 때 공익법인법 개정으로 규제가 풀렸다. 원금의 일부를 주무 관청의 허가를 거쳐 사용할 수 있도록 하고, 투자 수익의 80% 이상을 공익사업에 쓰는 성실공익법인은 신고만으로 원금의 10%까지 쓸 수 있게 된 것. 미국은 매년 공익법인이 원금의 5% 이상을 공익사업에 사용하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반면 국내 상위 20개 기업재단의 원금 대비 목적 사업 지출은 3.20%에 그쳤고, 5% 이상을 공익사업에 사용한 곳은 삼성미래기술육성재단(12%), 엘지연암학원(7.88%), 엘지연암문화재단(7.58%), 두산연강재단(7%) 등 4곳에 불과했다. 동행복지재단이 0.036%로 가장 적었고, 하이트문화재단(0.39%)과 SBS문화재단(0.47%)이 뒤를 이었다.
투명성 수준 낮아… 질적 성장 고려할 때
기업 재단의 지배구조 개선과 투명성 문제도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2017년 다우존스 지속가능경영지수(DJSI)에 따르면 국내 기업의 투명성 점수는 45.2점으로 DJSI에 편입된 국내 기업의 총 평균(72.2점)보다 크게 낮았다. 실제로 상위 20개 기업재단 중 11곳(55%)은 오너 일가가 재단 대표 또는 이사로 등재돼 있고, 14곳(70%)이 계열사 주식을 보유하고 있다. 기업 자산과 개인 사재를 함께 출연한 재단도 11곳에 달했다. 현대차정몽구재단은 현대글로비스와 이노션 지분 3934억원어치를, 엘지연암문화재단과 엘지연암학원도 LG그룹 상장 계열사 지분 3518억원어치를 보유하고 있었다(2016년 기준). 권오인 경실련 경제정책팀 팀장은 "계열사 주식을 1%만 보유해도 의결권과 세금 회피 등에 공익법인이 변칙적으로 활용될 수 있다"면서 "기업 재단에 대한 별도 세무조사 기준 마련, 공익재단 의결권 제한 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상위 20개 기업재단 중 홈페이지에 재무보고서, 이사회 회의록, 사업 현황을 모두 공개한 곳은 엘지연암학원 단 한 곳뿐이었다. 삼성생명공익재단, 성보문화재단, 하이트문화재단 등 기업재단 7곳은 홈페이지를 통해 위 정보를 모두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현대차정몽구재단은 재무보고서와 유사한 형태의 재무상태표를 게시, 이사회 회의록 대신 이사회 구성에 관한 정관과 일부 사업에 관한 사업 실적을 공개하고 있었다. 재무보고서와 사업 현황은 투명성과 임팩트를, 이사회 회의록은 거버넌스와 자금 지출에 대한 의사 결정 현황을 평가할 수 있는 주요 척도다. 독일 BMW 헤르베르트콴트재단은 재무보고, 사업 현황은 물론 이사회 구성원들의 활동까지 자세히 공개하고 있다. '비영리법인을 위한 10가지 권장사항'에 따라 창업주와 기업재단의 관계를 안내하는 등 대중과의 접근성과 가독성도 높이고 있다. 전현경 아름다운재단 기부문화연구소 실장은 "재단의 지속가능성과 임팩트를 높이려면 양적 팽창을 넘어 조직 안팎에서 다양한 혁신을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