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대 국회가 개원한 지 두 달 된 1964년 2월, 모 여당 의원은 매일 새벽 6시 집을 나섰다. 꼭두새벽에 가야 할 곳이 딱히 있어서가 아니었다. 졸업·취업 철이 되자 취업을 부탁하려는 지역구 유권자들이 매일 집으로 몰려오니 몸을 피한 것이다. 그 의원은 다방이나 호텔에서 머물다가 의사당으로 향했다. 넘어야 할 산은 또 있었다. 태평로 국회의사당 앞에도 의원들을 만나려는 사람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그 의원은 "인파 사이를 지나갈 땐 마치 2차대전 때 나치의 검문을 받는 유태인 심정이 된다"는 표현까지 했다(조선일보 1964년 2월 19일 자).
'빽'이 통하던 시절, 국회의원들에 대한 유권자들의 청탁이 도를 넘는 일이 많았다. 의원들 사이에 "청탁 노이로제에 걸리겠다"는 말이 돌았다. 청탁 중 절대 다수는 취직 부탁이었다. 어느 의원 집엔 이력서 3000장이 쌓였다. 의원의 친척, 선·후배 등 아는 사람은 물론이고, 불특정 유권자들의 막무가내식 청탁이 의원들을 진땀 흘리게 했다. 1968년 7월 서울 세운상가에 최초의 의원회관이 들어서자, '청탁족(族)'이 하루 수백 명씩 찾아와 회관 휴게실에서 낮잠까지 자며 의원들을 기다렸다. 이 무렵 여야 의원 192명에게 '가장 압박을 느끼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1위는 선거구민(31%)이고 2위가 기자(21%), 3위가 후배(6%)였다.
유권자들이 의원에게 취직시켜 달라고 떼를 썼던 풍토는 일부 의원에게도 책임이 없지 않았다. 선거운동할 때 한 표라도 더 낚겠다는 심정에서 취직 약속을 한 경우도 있었다. 의원들은 당선 뒤 취직 민원을 성사시켜 보려고 기업체나 관공서를 압박했다. 1950년대에 어느 의원은 모 부처가 취업 청탁을 들어주지 않자, 그 부처로 달려가 과장의 와이셔츠를 찢고 폭행했다고 보도됐다.
특히 1960년 4·19혁명 직후에 국회의원들에 대한 유권자들의 취업 청탁이 극성을 부렸다. 권력 교체기를 틈타 일자리 하나 차지하려는 사람들이 의원 사무실과 자택에 쇄도했다. 신문은 "장면 정권이 들어선 이후 제 세상 만난 민주당 신파의 어중이떠중이 취직 청탁 등쌀에 관아는 정신이 어찔할 지경"이라고 질타했다(동아일보 1960년 10월 30일 자).
정권마다 '관폐 근절' '청탁 배격'을 외쳤지만 뿌리 깊은 청탁 악습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이젠 의원 집으로 쳐들어갈 필요도 없다. 의원 휴대폰 화면에 뜬 "아들 ○○○, △△그룹 시험 봤습니다. 신경 좀 써주십시오"라는 식의 문자가 취재진 카메라에 포착된 적도 있다. 올 들어서도 여당 거물 의원의 처남 취업 청탁 의혹 사건이 구설에 오르더니, 최근엔 강원랜드에 취업을 청탁한 혐의로 야당 의원 여럿에 대해 검찰 수사가 진행 중이다. 사실이라면 의원뿐 아니라 청탁한 사람들의 죄도 가볍지 않다. "국회의원이 국가의 공복(公僕)이 아니라 지역구민의 사복(私僕)이 되고 있다"고 했던 반세기 전 어느 정치인의 한탄이 오늘에도 과히 틀린 말이 아닌 것 같아 한숨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