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인’ 이승훈(30)의 평창올림픽은 누구보다 길다. 그는 개막 이틀 뒤인 11일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5000m로 대회를 시작했다. 시즌 월드컵 랭킹 19위로 가장 취약한 종목이었지만, 이승훈은 "내가 장거리를 포기하면 대(代)가 끊긴다"며 출전했다. 이승훈은 5000m와 1만m 레이스에서 무서운 뒷심을 발휘하며 홈 팬들에게 감동을 안겼다.

15일 오후 강릉 스피드스케이팅경기장에서 열린 2018 평창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1만m 경기에서 이승훈 선수가 레이스를 펼치고 있다.

5000m 결승에 진출한 11개 조 중 5조로 출전한 그는 뒤로 갈수록 속도를 높였다. 결승선을 앞두고 함께 달리던 바르트 스빙스(벨기에)를 제치자 경기장은 팬들의 함성으로 뒤덮였다. 그는 6분14초15로 5위를 했다. 소치올림픽(12위)보다 좋은 성적이었다. 이승훈은 막판 두 바퀴(800m)를 평균 29초13에 끊었다. 크라머르의 마지막 800m(29초50)보다 빨랐다.

5000m에서 쾌조의 컨디션을 선보인 이승훈은 ‘빙상의 마라톤’이라 불리는 15일 1만m에서도 좋은 레이스를 펼쳤다. 12분55초54라는 개인 최고 기록으로 4위를 기록했다. 이번에도 뒤로 갈수록 폭발적인 레이스를 펼쳤다. 열 바퀴를 남겨놓고 매 바퀴 30초대 초반으로 달린 그는 마지막 바퀴를 29초74라는 경이적인 기록으로 주파했다.

15일 오후 강릉 스피드스케이팅경기장에서 열린 2018 평창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1만m 경기에서 결승선을 들어온 후 열을 식히고 있는 이승훈 선수.

5000m와 1만m로 가능성을 확인한 이승훈은 이제 메달 유망 종목인 팀추월과 매스스타트에 도전한다. 18일 시작하는 팀 추월은 이승훈이 소치올림픽에서 김철민·주형준과 함께 은메달을 딴 종목이다. 팀 추월은 3명으로 이뤄진 두 팀이 링크(한 바퀴 400m)의 양쪽 중앙에서 동시에 출발해 8바퀴(남자)를 도는 종목이다. 이승훈은 이번 올림픽에선 10대 선수인 김민석(19)·정재원(17)과 호흡을 맞춘다.

맏형의 어깨가 무거울 수밖에 없다. 이승훈은 소치올림픽 결선 당시 8바퀴 중 중반 4바퀴를 맨 앞에서 끌었다. 선수들이 한 바퀴씩 번갈아 선두로 나섰던 네덜란드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맨 앞에서 달리면 공기 저항을 그대로 받아 30% 이상 힘을 더 써야 하지만, '에이스' 이승훈은 책임감을 갖고 힘을 냈다. 이승훈은 "이번에도 3~4바퀴를 앞에서 책임지려고 한다. 죽기 살기로 버틸 각오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

평창올림픽 신설 종목인 매스스타트는 지정된 레인 없이 동시에 출발해 16바퀴를 돌아 순위를 가리는 경기다. 쇼트트랙처럼 자리 싸움도 벌어지기 때문에 쇼트트랙 선수 출신인 이승훈에겐 안성맞춤이다. 올 시즌 월드컵 시리즈에서 이승훈은 쇼트트랙의 추월 장면을 연상시키는 뛰어난 코너링 기술을 선보이며 두 차례 정상에 올랐다. 이승훈의 올 시즌 랭킹은 1위다. 이승훈은 대회를 앞두고 “처음부터 끝까지 빛나는 선수가 되겠다”고 말했다. 이승훈의 올림픽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강릉=장민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