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 끝이 건반에 닿는 순간 피아노에서 파르스름한 생명력이 피어올랐다. 4일 오후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5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코리안챔버오케스트라(지휘 정민)와 생상스 피아노 협주곡 2번을 함께 한 피아니스트 손정범(27)은 힘 있고 정확한 손놀림, 나이를 뛰어넘는 표현력으로 청중을 사로잡았다.

지난해 9월 독일 ARD 국제 음악 콩쿠르에서 피아노 부문 한국인 최초로 우승한 손정범은 올해 가장 기대를 모으는 신인이다. 독일 최고 권위의 음악 경연대회인 ARD는 3년 동안 독일 내 이름난 공연장에서 50회의 연주 기회가 주어지는 콩쿠르. 2015년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한 조성진, 지난해 6월 밴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1위 한 선우예권에 이어 본격적으로 세계무대 진출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셈이다.

“잘 안 웃나 봐요?” 사진기자 말에 손정범은 입을 다문 채로 ‘흐흐흐’ 웃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시폰 케이크. “저랑 안 어울리죠? 그래서 작게 말씀드리는 거예요.”

지난 1일 서울 서초동에서 만난 손정범은 모차르트의 피아노를 위한 환상곡 d단조와 쇼팽의 피아노를 위한 12개의 연습곡을 들려주기 위해 구슬땀을 흘리는 중이었다. 다음 달 8일 서울에서 독주회를 연다. 그의 열 손가락 끝엔 딴딴한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네 살 때인가. 큰아버지가 제 손을 보며 '넌 손이 꺼멓고 남자다우니 권투선수를 하면 되겠다'고 하셨지요. 화가 난 어머니는 '내 아들도 예쁘고 고운 걸 할 수 있다'며 다음 날 피아노 학원에 절 데려가셨어요."

여덟 살 때 금호영재콘서트로 데뷔했다. 스무 살에 에네스쿠 콩쿠르에서 1위 없는 2위, 이듬해 스위스 제네바 콩쿠르 특별상, 2013년 발티돈 콩쿠르 2위 등을 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늘 한 끗 차이로 우승을 놓치는 자신을 채찍질하기 위해 마지막 각오로 나간 ARD였다.

경연 장소였던 독일 뮌헨의 헤라클레스홀은 세계 최고 음악가들이 수시로 찾아와 연주하는 명소. 돈이 없어 쩔쩔맸던 뮌헨 유학 시절, 손정범은 좋아하는 피아니스트가 오면 벼르고 별러 그곳에 갔다. 새벽부터 줄 서 있다가 기적적으로 취소되는 자리가 있으면 꼬불쳐 둔 쌈짓돈으로 표를 사 객석 불이 꺼지기 직전 입장했다. "그리고리 소콜로프와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의 연주를 보며 '나도 할 수 있을까?' 늘 생각한 곳에서 연주하게 된 거죠." 손정범은 자신을 "더 잘하고 싶은 욕심으로 가득 찬 사람"이라고 했다. "비교 대상도, 협연하고 싶은 악단도 없어요. 그냥 지금보다 좀 더 잘 쳤으면 좋겠어요. 저한테 피아노는 죽도록 파야 할 학문이라서 어디서 누구랑 하든 행복하거든요."

직업란엔 여전히 '학생'이라 쓴다. "손발이 오그라들 만큼 창피해서"란다. 세계를 향한 날갯짓을 시작하게 된 비결은 "끈기, 스스로에 대한 객관적 시선, 약간의 자만심"이라고 했다. 손정범은 "실력이 늘지 않는 사람의 첫 번째 문제는 자기를 이미 피아니스트라 여기는 것"이라며 "우리는 남이 그렇게 불러줄 때 비로소 의미 있는 존재"라고 말했다.

금호아티스트 'The Winners' 손정범 Piano=3월 8일 오후 8시 서울 금호아트홀, (02)6303-19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