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사실무근'→ 2차 '문제의 문건 다수'
판사 발령 취소 논란에 임종헌 차장 사표
"비밀번호 걸린 파일 있다" 진술에 발칵

대법원 법원행정처가 진보 성향 판사들의 이른바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관리했다는 논란은 작년 2월 한 판사의 이례적인 인사가 나면서 불거졌다. 1년 가까이 법원 내부에서는 숱한 갈등이 빚어졌고, 진상조사만 2차례 진행됐다. 이 과정에서 법원행정처 차장이 물러났다.

서울 서초구 대법원 모습

법원행정처는 작년 2월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심의관으로 발령받은 이탄희(40) 판사를 발령 11일만에 원래 근무하던 수원지법 안양지원으로 되돌려 보냈다. 이례적인 이 인사를 앞두고 이 판사가 사표를 낸 사실도 알려졌다. 법원의 인사·예산·사법 정책을 총괄하는 법원행정처는 대법관이 처장을 맡고 있으며, 판사들 사이에서는 요직(要職)으로 꼽힌다.
이 판사에 대한 이례적인 인사를 두고 법원 내부에서는 여러 의혹이 제기됐고, 한 언론은 '행정처의 부당한 지시를 거부했다가 인사조치를 당한 것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했다. 이 판사가 소속된 법관연구모임인 국제인권법연구회가 '사법개혁과 법관인사제도'를 주제로 학술대회를 추진했는데, 행정처가 이 판사에게 학술대회 규모를 줄일 것 등을 지시했는데도 듣지 않자 인사조치를 당한 것 아니냐는 것이다. 이 사태에 책임을 지고 유력한 대법관 후보였던 임종헌(59) 행정처 차장이 사표를 냈다.

대법원은 곧바로 진상조사에 나섰다. 한달쯤 뒤인 4월18일 진상조사위원회(위원장 이인복 전 대법관)는 "'부당 지시'는 있었지만 행정처가 이 판사에게 보복성 인사 조치를 한 적은 없다"고 결론냈다. 또 이 판사가 원 근무지로 복귀한 것은 본인이 강하게 요청한 데 따른 것이라고 밝혔고, 부당한 지시를 한 사람은 당초 지목됐던 임 전 차장이 아니라 양형위원회 이규진 상임위원이었다고 했다.
1차 조사과정에서는 또 다른 의혹이 제기됐다. 이 판사가 "이규진 상임위원으로부터 기획조정실 컴퓨터에 비밀번호가 걸린 '판사 뒷조사 파일'이 있다고 들었다"고 진술했기 때문이다. 진상조사위는 "블랙리스트가 존재할 가능성을 보여주는 어떤 정황도 드러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이 판사의 진술은 이른바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으로 번졌다. 법원 내부에서는 양승태 대법원장이 퇴임 등 사법부 수뇌부 교체기를 앞두고 법원 내 '보혁 갈등'이 표출된 게 아니냐는 말이 나왔다. 전국법관대표회의(판사회의)와 전국법원장회의에서도 이 문제가 논의됐고, 진상조사를 새로 해야한다는 요구가 잇따랐다.

작년 6월 28일 양 전 대법원장은 판사들의 추가 조사 요구를 거부했다. 당시 양 대법원장은 “객관적이고 중립적으로 구성된 조사기구가 독립적 위치에서 자율적 조사과정을 거쳐 결론을 내렸다면, 그 결과에 일부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있더라도 그에 대해 다시 조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충분하고도 구체적인 법적·사실적 근거도 없는 상태에서 법관이 사용하던 컴퓨터를 열어 조사한다면 교각살우(矯角殺牛)의 우를 범할 수도 있다”고 했다.

양 대법원장은 그해 9월 22일 퇴임식에서도 “사법체계의 근간이 흔들리거나 정치적인 세력 등의 부당한 영향력이 침투할 틈이 조금이라도 허용되는 순간 어렵사리 이루어낸 사법부 독립은 무너지고 민주주의는 후퇴하고 말 것”이라고 말했다.

‘사법부 블랙리스트’와 관련해 검찰 조사 대상이 된 김명수(오른쪽) 대법원장과 양승태 전 대법원장. 전·현직 대법원장이 동시에 검찰 수사 대상이 된 것은 전례 없는 일이다.

金 대법원장, 취임 직후 재조사 추진
재조사위, 동의없이 PC 강제 조사
결과 나와도 '논란과 갈등'은 여전

김명수 신임 대법원장은 9월 26일 취임과 동시에 ‘사법부 블랙리스트’ 추가 조사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고, 11월 민중기 서울고법 부장판사를 위원장으로 하는 추가조사위원회를 꾸렸다. 위원장은 국제인권법연구회의 전신(前身)으로 알려진 우리법연구회 출신이고, 조사위원 6명 중 4명이 국제인권법연구회 소속으로 알려져 편향성 논란도 빚었다.

김 대법원장은 취임 전 인사청문회 때는 블랙리스트 재조사와 관련해 “모든 내용을 다시 살펴서 처리하겠다”고 했고, 작년 9월 첫 출근 때는 “사법부 블랙리스트 재조사 여부는 당장 급하게 결정해야 할 문제"라고 했다.

추가조사위원회는 11월 29일 밤 의혹을 받고 있는 판사들의 컴퓨터를 확보했고, 작년 12월 말 본인들의 동의를 받지 않은 채 PC 복구 등 강제 조사를 진행했다. 추가조사위원회는 두 달여 동안의 조사를 거쳐 22일 “법관의 독립을 침해하는 정황이 담긴 문건이 여러 건 발견됐다”고 최종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그러나 법원 내부에서는 조사 결과와 상관없이 논란과 갈등이 쉽게 가라앉지 않을 전망이다.

한편 김명수 대법원장은 작년 12월 주광덕 자유한국당 의원이 판사 PC 조사가 위법하게 진행됐다며 고발한 사건으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작년 6월 시민단체가 사법부 블랙리스트 작성 등에 관여한 혐의로 각각 형사고발됐다. 전현직 대법원장이 모두 검찰 수사 대상에 오른 것이다.


☞국제인권법연구회
국제인권법연구회는 회원 수가 450명에 이르는 법원 내 최대 연구 모임이다. 2011년 만들어졌고, 인권 관련 학술연구 외에도 독서 토론, 공연 관람 등 다양한 활동을 해 최근 몇 년 사이 젊은 판사들이 대거 가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법원 내에서는 진보적 성향 법관들의 모임인 옛 '우리법 연구회' 출신들이 초기에 모임 설립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초대 회장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