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오전 1시쯤. 서울 종로5가 인근 중식당에서 배달원으로 일하는 유모씨(53)는 동료들과 술을 마셨다. 취기가 오른 유씨는 홀로 술집을 나와 여관이 밀집한 시장 골목으로 들어섰다. 유씨 눈에 들어온건 분홍색 페인트가 칠해진 2층 여관. 오전 2시쯤, 유씨는 여관에 들어가 카운터에 앉은 여관 주인 김모씨(71·여)에게 "여자를 불러달라"고 했다.

20일 오전 서울 종로구 종로5가의 한 여관에서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가 발생했다.

김씨가 "여기는 그런 곳이 아니다"며 숙박을 거부했다. 몇번의 고성이 오고갔고, 화가 난 유씨는 오전 2시 6분쯤 경찰에 전화를 걸어 "숙박을 거부하는 업소가 있다"며 신고했다. 여관 주인 김씨도 경찰에 두차례 전화를 걸어 "소란을 피우며 업무 방해를 한다"고 신고했다.

오전 2시9분쯤 경찰이 도착했다. 유씨는 여관 앞에 서서 경찰을 기다리고 있었다. 경찰이 현장에서 본 유씨의 모습은 만취 상태가 아니었다. 똑바로 의사표현을 하며 여관 주인에 대해 항의했다. 경찰은 "성매매와 업무방해로 처벌될 수 있다"며 경고를 하고 돌아갔다.

유씨는 분이 풀리지 않았다. 택시를 타고 2km 떨어진 주유소로 향했다. 주유소 직원에게 페트병에 휘발유를 담아달라고 했다. 주유소 직원이 만류했다. 유씨는 "차에 기름이 떨어진 급한 상황"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주유소 직원은 전용용기에 휘발유 10여리터(ℓ)를 담아서 판매했다. 오전 3시8분쯤, 여관에 다시 나타난 유씨가 휘발유를 여관 1층 출입구에 뿌렸다. 주머니를 뒤적거려 꺼낸 비닐을 한손에 쥐었다. 다른 손으로는 라이터를 켜 불을 붙였다. 유씨는 비닐을 바닥에 던졌다.

경찰과 소방 관계자들이 현장에서 화재 조사를 하고 있다.

여관 1층 곳곳에 휘발유를 뿌리면서 유증기가 퍼져 불길은 더 빠르게 번졌다. 1층 한 가운데 복도에서 시작된 불은 양옆 방 4개를 삼켰다. 검은 연기가 2층으로 솟았다. 인근 주민들이 소화기 10여대를 가져와 진화를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오전 3시 11분쯤 종로구조대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 여관에서는 검은연기와 불꽃이 보이는 상황이었다. 16평(54m2) 면적인 1층이 순식간에 탔다. 가스가 터진 듯 '쾅'하는 폭발 소리가 들렸다. 벽돌·슬라브조로 지어진 50년된 여관에는 스프링클러가 없었다. 건물 용도와 연면적상 설치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불길은 3층에 얹혀진 가건물까지 태웠다. 투숙객들은 이 가건물에 가로막혀 위로 대피할 수 없었다. 불은 소방당국이 차량 50대와 소방관 180여명을 현장에 투입한 끝에 약 1시간 만에 진압됐다.

유씨는 현장에서 잡혔다. 이상엽 혜화경찰서 형사과장은 “유씨가 불을 지르고 경찰에 나를 잡아가달라고 신고했다”며 “오전 3시 12분쯤 현장에서 서성이던 유씨를 현행범으로 체포했다”고 말했다.

유씨가 홧김에 지른 불은 투숙객 10명 중 5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늦은 시각이었던 만큼 잠을 자던 피해자들은 방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사망했다. 이들이 머물던 방은 2~3평 남짓한 쪽방이다. 이상엽 형사과장은 “주로 저소득 노동자들이 장기 투숙해온 것으로 보인다”면서 “피해자들의 신원은 아직 파악 중이다”고 말했다. 경찰은 여성 사망자 3명이 모녀관계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소방당국 관계자는 “시신 3구는 훼손이 심해 신원파악이 어려운 상황”이라고 했다.

나머지 투숙객 5명은 부상을 입거나 연기를 흡입해 인근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2명은 병원으로 옮겨질 당시 심폐소생술(CPR)을 받을 정도로 위중했으나 이후 호전돼 생명에 지장이 없는 상태로 전해졌다.

이날 서울 혜화경찰서는 유씨가 "술에 취해 성매매를 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 여관에 무작정 찾아갔다"는 진술을 확보했다고 밝혔다. 경찰은 유씨에 대해 현존건조물방화치사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할 방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