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스퍼드대 역사학 교수이자 러시아혁명사의 권위자인 로버트 서비스가 쓴 두툼한 평전 '레닌'이 지난달 다시 나왔다. 출판사 교양인 측은 "원래 볼셰비키 혁명 100주년에 맞춰 2017년 10~11월에 내려고 했는데 출간이 조금 늦어졌다"고 설명했다.

나는 이 책을 2001년에 나온 시학사 판으로 읽었다. 책의 몇 구절을 나의 데뷔작 '표백'에서 인용하기도 했다. 내 소설은 일종의 '반(反)혁명'에 대한 내용이었고, 거기서 레닌을 언급하면 그럴싸한 분위기가 나리라 기대했다. 체 게바라 얼굴이 그려진 티셔츠가 풍기는 정도의.

레닌주의에 끌렸던 적은 한 번도 없었으나 레닌이라는 인물은 흥미로웠다. 하루 24시간 혁명만을 생각했고, 혁명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던 냉혹한 마키아벨리주의자. 신념과 행동을 일치시켰고, 번민과 후회가 없었던 인간. 논쟁에서 지는 법이 없었던 천재. 철부지 시절에는 다들 꿈꿔봤을 만한 인물형 아닌가.

그런데 사실 20여 년 전만 해도 레닌에 대해 알려진 바는 그런 판타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소련은 레닌의 친척과 동료들이 쓴 글마저 기밀로 분류했고, 부인의 회고록도 검열했다. 레닌을 예수 같은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 시기 세상 다른 쪽에서 그는 사탄이었다.

저자가 소련의 비밀 문서를 샅샅이 조사해 그린 레닌의 진짜 모습은 어떨까. 정직한 감상은 '그도 누군가에게는 착한 아들이고 다정한 남편이었구나'가 아니라, '어떻게 사람이 이럴 수 있지?' 쪽이다. 그는 교활했고, 무자비했고, 오만했고, 조급했다. 아첨을 싫어했지만 자신에 대한 숭배가 혁명에 도움이 될 거라 여기고 받아들이는 야심가였다. 복잡한 인간이었나? 글쎄, 비범하게 단순한 인간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혁명 외에 다른 건 거들떠보지 않았던.

그런 면에서는 조조나 이방원, 체사레 보르자의 전기를 읽는 기분으로 '가볍게' 집어 들어도 만족스러운 책이다. '피를 흘리더라도 지름길로 가자'는 분노와 혼란이 팽배했던 제정 러시아 말기와 지금의 한국을 비교하며 읽어도 흥미진진할 것이다. 레닌은 괴물 같은 시대를 만들었지만, 그 역시 기괴한 시대의 산물이었다.

시학사 판은 908쪽이었는데, 새로 나온 교양인 버전은 848쪽이다. 판형이 커진 탓. 그러나 주석이 늘어나 글자 양은 더 많다고 한다. 러시아혁명사를 전공한 김남섭 서울과기대 교수가 새로 번역했다. 영어 원서뿐 아니라 러시아어 판본도 검토해 꼼꼼히 옮기면서 원저자의 고유명사 표기 오류까지 바로잡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