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13일 도쿄 시나가와구 소니 본사 2층의 소니 스퀘어(Sony Square). 안내 직원이 버튼을 누르자 벽 전체가 '스르륵' 소리를 내며 열리더니 밖에서 보이지 않던 비밀 공간이 나타났다. 고급 주택처럼 내부를 꾸며놓은 1200㎡(약 360평) 면적의 공간에는 화면에서 소리가 나오는 OLED(유기발광다이오드) TV, 0.03초 만에 자동 초점을 잡아주는 카메라 이미지 센서 칩 등 현재 소니를 대표하는 제품 20여 점이 전시돼 있었다. '퓨처룸'이라고 이름 붙여진 작은 공간에는 동작 감지 센서를 활용해 펜이나 컴퓨터 없이 손짓만으로 건물·자동차 등을 설계할 수 있는 첨단 기기 등 소니가 연구개발 중인 제품들도 눈에 띄었다. 소니 관계자는 "이곳은 소니 기술의 역사와 미래를 볼 수 있는 공간"이라며 "소니가 어떤 환경에서도 '기술력'으로 살아남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일본 기업들이 2000년대 디지털 시대로 접어들면서 미국·한국에 뺏겼던 테크놀로지(Technology·기술) 패권을 되찾기 위한 반격에 나서고 있다.
◇무인 택시·휴머노이드·차세대 배터리… 테크 패권에 도전하는 일본
4차 산업의 핵심인 자율 주행차와 인간형 로봇(휴머노이드)에서 일본은 미국 추격에 총력을 쏟고 있다. 도요타·닛산 같은 자동차 기업은 물론이고 벤처기업들도 자율주행차 세계 최초 상용화 경쟁에 나서고 있다. 지난달 14일에는 벤처기업 ZMP의 무인(無人) 자동차가 사람을 한 명도 태우지 않은 채 시속 20km의 속도로 도쿄 시내를 주행하는 데 성공했다. 같은 날 또 다른 벤처기업인 아이산테크놀로지도 아이치현에서 무인차 주행에 성공했다. 앞서 11월에 무인차 시험 주행에 성공한 미국 구글과 한 달 차이로 경쟁하고 있는 것이다. ZMP의 다니구치 히사시 대표는 "2020년 도쿄올림픽 때는 외국인들이 하네다공항에서 무인 택시를 타고 도쿄로 들어오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휴머노이드 분야에서는 도요타가 지난해 11월에 온몸에 32개 관절과 10개 손가락을 가진 원격 조정 로봇 'T-HR3'을 내놔 세계 최고 기술력을 입증했다. 이용자가 고글을 쓰고 로봇의 시야에 비친 영상을 같이 보면서 움직이면 이 로봇이 사람의 움직임을 따라 한다. 부품업체도 한발 앞서가고 있다. TDK는 작년 11월 "2018년 4월부터 차세대 배터리 '전고체 전지'를 양산한다"고 발표했다. 전고체 배터리는 현재 주로 쓰는 리튬이온전지의 액체 전해질 대신 세라믹을 사용해 배터리 발화 가능성을 사실상 제로로 만들었다.
◇인수·합병으로 기술 경쟁력 더 키워
전문가들은 "일본 기업들이 자사 기술에 집착하던 과거의 폐쇄성을 버리면서 더 강해지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다양한 파트너십과 인수·합병으로 외부 기술을 흡수하며 외연을 확장하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올 초 자동차업체 혼다는 중국 인터넷기업 알리바바와 커넥티드카(connected car·인터넷에 연결된 첨단 자동차)를 공동 개발한다고 밝혔다. 일본 전자업체 파나소닉은 미국 전기차업체 테슬라와 합작으로 50억달러(약 5조3400억원)를 투입해 미국 네바다 사막에 세계 최대 전기차 배터리 공장을 세웠다. 2000년대 초중반 세계 표준과는 거리가 먼 독자적인 통신·TV 기술을 고집하다가 스마트폰과 TV 시장에서 밀렸던 것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대규모 해외 기업 인수도 달라진 모습이다. 일본 통신업체 소프트뱅크는 최근 세계 최대 차량 공유업체인 우버의 지분 20%를 96억달러(약 10조2400억원)에 인수했다. 또 930억달러짜리 투자 펀드를 만들어 자율주행차 벤처 나우토(1억5900만달러), 임프로버블(가상현실·5억달러), 원웹(통신위성·10억달러) 등 기술 벤처들을 연이어 인수하고 있다. 일본 최대 제약사 다케다제약이 지난해 항암제 분야의 최고 신약 개발력을 인정받는 미국 아리아드 파마슈티컬스를 54억달러에 인수한 것도 바뀐 일본의 모습이다.
김창경 한양대 교수(과학기술정책학과)는 "일본은 2000년대 주춤했다고 하지만 그건 완제품 일부이고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부품·소재와 기초과학 분야에서는 최고의 기술력을 유지해왔다"며 "신개념의 테크놀로지 제품과 서비스가 쏟아지는 시대에 일본 기술기업들의 저력이 다시 조명받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