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에 숨진 스위스 소설가 로베르트 발저(1878~1956)의 산문과 단편 선집 '세상의 끝'(문학판)이 최근 나왔다. 임홍배 서울대 독문과 교수가 1500편이 넘는 발저의 산문과 콩트 중 대표작 60편을 우리말로 옮겼다. 수록작 중 10편을 제외하곤 국내 초역이라고 한다. 독문학계에서 발저는 카프카에게 큰 영향을 미친 작가로 꼽혀 왔다. 발저가 단편 '사무원'(1902년)을 통해 '사무원은 우리 생활에서 아주 친숙한 존재지만 아직까지 제대로 글로 다루어진 적이 없다'고 시작하면서 근대 사회를 풍자한 것은 카프카의 '변신'(1916년)에 변형된 형태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발저는 젊은 시절엔 은행원이었지만 시인으로 두각을 나타냈고, 여러 차례 은행을 옮겨 다니면서 작가로서 입지를 굳혔지만, 쉰 살이 넘어 정신분열증 진단을 받은 뒤 28년이나 정신병원에 입원한 채 외롭게 글쓰기에 매달렸다. 그는 '고독한 산책자'의 시선으로 근대 이후 실존의 불안을 우화적으로 그려내 독자를 일깨우거나 스위스의 수려한 자연환경을 섬세하게 묘사하면서 삶의 기쁨을 노래하기도 했다. 헤르만 헤세가 "발저의 독자가 1만 명만 되면 세상은 더 좋아질 것"이라고 찬사를 던졌을 정도였다. 발터 베냐민은 "발저의 인물들은 칠흑처럼 어두운 밤을 가물거리는 희망의 초롱불로 밝힌다"고 했다.
발저는 스위스의 헤리자우 정신병원에 입원했다가 1956년 12월 25일 슬그머니 병원을 나와 눈밭을 홀로 거닐다가 쓰러져 숨졌다. 당시 경찰이 현장에서 찍은 사진엔 발저의 마지막 발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눈밭에서 '세상의 끝'을 맞은 발저는 1917년 단편 '세상의 끝'을 발표한 적이 있다. 길을 떠난 고아(孤兒)가 세상의 끝을 찾아가 거처를 마련하지만 그 이후의 비극을 반어법(反語法)으로 암시하면서 끝나는 이야기였다.
발저는 문명의 진보로 인해 인간이 느끼는 상실감을 일찌감치 묘사한 작가였다. 그는 산문 '타자기'(1927년)를 통해 타자를 치는 유행을 거부한 채 육필을 고집하면서 "나는 지금 아주 불편하게 글을 쓰고 있고, 이런 불편함에 매료되어 있다"라고 밝힌 뒤 자신을 중세 유럽의 '부랑자'처럼 잃어버린 신비를 찾아 떠돌아다닌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