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성남 자택 앞 산책 길에서 만난 정현백(오른쪽) 장관과 91세 어머니. 평생 자신을 뒷바라지한 어머니에 대해 정현백은 “집안 살림을 챙기는 게 생활비를 벌어오는 사람을 위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하신다”며 “자식에게 신세 지고 사는 쓸모없는 노인네가 되고 싶지 않다는 어머니의 자존심”이라고 했다.

누구의 엄마도 아니고 엄마인 적도 없는 그녀가 이 땅 엄마들을 위해 일하고 있다.

64세인 그는 결혼하지 않았다. 아이도 없다. 아흔 넘은 노모(老母)와 함께 살고 있다. 그의 집에는 62세 남동생 부부와 자녀가 함께 산다. 여성가족부 장관 정현백 이야기다.

"10년 전까지 아파트에 살다가 동생과 집을 합쳤어요. 저와 어머니가 1층과 2층 절반을 쓰고, 2층 나머지와 3층을 동생 가족이 씁니다. 한 집에 3대가 같이 살고 있어요."

현재 한국 사회에서 가장 빠르게 바뀌는 개념 중 하나는 '가족'이다. 1인 가구 비율이 30%에 육박하고 성인 여성 미혼율이 40%에 가까운 한국에서 정현백은 여성과 가족 정책을 지휘하고 있다. 자발적 미혼을 뜻하는 비혼(非婚) 인구가 크게 늘면서 '비혼 출산'과 '낙태 합법화' 같은 이슈도 쏟아지고 있다. 자연스레 여성가족부 장관에게 쏠리는 눈길도 많아지고 매서워졌다. 평생 학자 겸 시민운동가로 살아오다가 여가부 장관으로 만 5개월 일한 정 장관을 두 번에 걸쳐 만났다. 지난달 8일과 12일 서울 정부종합청사와 경기 성남 수정구 자택에서였다.

"나는 결혼을 안 한 게 아니라 못 한 것"

―젊을 때부터 결혼하지 않겠다는 생각이었나요?

"아뇨.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유학 갔다 오니 이미 또래 남성들이 결혼을 다 했더라고요. 또 저는 선봐서 결혼하진 않겠다는 고집이 있었는데 대단히 비현실적인 생각이었죠. 지금도 아예 결혼하지 않겠다는 생각은 없어요. 전 늘 '못 한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지난 7월 장관에 취임하기 전까지 그는 30년을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로 일했다. 동시에 한국여성단체연합, 참여연대 공동 대표 등을 지내며 시민운동가로도 활동해왔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으면 이렇게 계속 일할 수 있었을까요?

"교수와 시민운동 둘 중 하나는 포기했겠죠. 아마 시민운동은 못 하고 학교 생활만 열심히 했을 거예요. 실제로 우리 연배에 독신 여자 교수가 많아요. 다들 공부량도 많고 경쟁도 심하니 현실적으로 결혼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요즘 젊은 여성들이 결혼도 안 하고 애도 안 낳겠다고 하는데, 그 마음을 잘 아시겠네요.

"한국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려면 결혼과 일을 병행하기 어렵다는 걸 이해하죠. 전문직으로 일했던 제 친구들 가운데 딸이 육아 때문에 쩔쩔매면 아이를 대신 봐주는 경우가 많아요. 자신이 일하면서 아이 키우느라 힘들었던 경험이 있으니까요. 우리 세대는 일과 가정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어요. '82년생 김지영'은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던 셈이죠." 조남주 소설 '82년생 김지영'은 현재 한국에서 '워킹맘'으로 사는 젊은 여성에 대한 일종의 보고서다.

―애도 안 낳아본 사람이 여가부 장관을 어떻게 하느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죠?

"애 낳았다면 장관 훨씬 잘했을 거라고 말하는 분들이 계세요. 그럼 아이 낳은 여성은 1인 가구 현실을 공감하지 못할까요? 아닐 거예요. 그래서 그런 말에 굳이 대응하지 않아요. 60 될 때까지 '언제 결혼할 거냐', '아는 사람 소개해주겠다' 소리를 들었어요. '애 몇 살이냐'고 대뜸 묻는 사람도 많았고요. 그런 관심들이 불편했습니다."

'가족=부모+자식'이던 시대는 지나

―어머니가 91세시죠. 어머니와 평생을 함께 사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요.

"독일 유학 후 한국에 들어와서부터 죽 부모님과 함께 살았어요. 독립해 나가려고 했더니 두 분이 외로워하셨죠. 주말에 부모님 뵈러 가는 시간도 꽤 걸려서 같이 사는 게 낫겠다 생각했어요. 아버지는 4년 전 폐가 좋지 않아 돌아가셨고요. 어머니와 함께 살다보니 자꾸 그 세대를 바라보게 돼요. 어머니 친구 중에 딸하고 같이 살다가 가출한 분이 계세요. 가족들이 찾고 난리가 났죠. 서울 강남에 있는 실버타운 들어가 '나는 나대로 여기서 살겠다'고 하셨대요. 자식들이 애걸복걸해도 집으로 안 들어가셨어요. 그나마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으니 가능한 일이었죠. 다음 세대에서는 나이 든 여성이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할 수 있었으면 해요."

―외롭지 않아서 결혼 생각이 없었던 건 아닐까요?

"아마 저 혼자 살았다면 외로워서 결혼했을지도 모르죠. 아니면 혼자 사는 여성들끼리 생활 공동체를 만들었을 수도 있어요. 저는 가족 형태가 다양해지면 좋겠어요. 이미 1인 가구가 27%를 넘어요.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됐습니다. 혼자 사는 사람끼리 모여 살면 생활비도 적게 들고 공동체 의식도 키울 수 있죠. 우리 사회는 이미 '부모와 자식' 형태만 정상 가족이라고 말할 수 없는 사회가 됐습니다."

―정부 정책은 부부와 자녀로 이뤄진 가족을 주 대상으로 삼지 않나요.

"사실 사람들 인식이 너무 빨리 변해서 국가가 허겁지겁 쫓아가는 상황이에요. 예를 들어 여성에게도 병역 의무를 지워야 하느냐는 얘기가 10년 전에 나왔는데 그땐 페미니스트들이 굉장히 반대했어요. 지금은 찬반이 그 안에서도 갈립니다. 낙태죄도 폐지하자는 사람이 그렇게 많을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어요. 남성만의 조사에서도 폐지와 존속이 거의 반반이었죠. 이미 현실이 되어버린 다양한 가족 형태를 인정하고 정부가 그에 맞는 서비스를 제공해야 합니다."

세종과 나주에 저출산 해결법 있다

―여성가족부 장관으로서 가장 부담스러운 문제는 무엇입니까?

"여성들이 좋은 일자리를 갖고 사회인으로 살아가도록 돕는 게 중요한 과제죠. 주변 똑똑한 친구들이 경력 끊기면서 겪는 어려움을 많이 봤어요. 스스로 불행하다고 느끼고 경제적으로도 힘들거든요. 애 낳고도 계속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저출산 문제도 풀 수 있을 것 같아요. 정부청사나 한전처럼 안정적 일자리가 몰려있는 세종시와 나주시 출산율이 가장 높은 것만 봐도 알 수 있죠." 세종시와 나주시의 출산율은 각각 1.82명과 1.59명이다.

―저출산은 10년도 넘은 사회 문제인데 해결책이 보이지 않습니다.

"전에는 시스템이 갖춰지면 여성들이 아이를 낳을 거라 생각했어요. 장관 돼보니 기업이나 가정이 바뀌지 않으면 사실상 풀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요. 일단 오랜 시간 일하는 문화를 바꿔야 하고요, 집에선 아빠도 적극적으로 육아를 분담해야죠. 오죽하면 '독박 육아'라는 말이 나왔겠습니까."

―여성 일자리를 늘리면 남성이 역차별받는다는 주장도 있죠.

"그게 요즘 흔히 얘기하는 남녀 간 갈등이죠. 저성장 시대로 접어들면서 청년들의 미래가 굉장히 불안하잖아요. 취업이나 의식주, 결혼도 하기 어려운 청년들의 절망감이 엉뚱하게 '여자들이 남자들의 몫을 뺏어갔다'는 생각으로 이어지는 거죠. 그것이 이른바 '여혐(여성 혐오)'이란 사회현상으로 나타나기도 하고요. 그런 박탈감이 소셜미디어를 타고 더 빠르게 퍼집니다. 사실 여성 고용률이 높아졌다 해도 대부분 저임금 일자리에 몰려있기 때문에 여성 역시 많은 것을 잃고 있습니다. 남성들은 소수의 성공한 여성을 보며 파이를 뺏겼다고 생각하는데, 전체 여성 중에 사법시험 붙고 외무고시 통과하는 여성이 몇이나 되겠어요?"

―'여성부 폐지하라'는 식의 원색적인 비난도 많이 받습니다.

"그래서 제가 파이 얘기를 많이 해요. 여가부 역할은 파이 일곱 개 가진 남성에게서 두 개를 뺏어 여성에게 주는 게 아니라, 열 개인 파이를 열두 개, 열세 개로 늘리는 거라고요. 그래서 저는 '성 평등이 당신들의 삶을 향상시킨다'고 설득합니다. 남성도 '고개 숙인 아버지'로 대변되는 외로운 부양 부담에서 해방될 테니까요."

독일 유학 시절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왼쪽에서 셋째).

남녀 사이에도 우열 가리는 한국 사회

―작년 '강남역 살인사건'이 '여혐 논란'의 기폭제가 됐고 최근 '데이트 폭력'도 자주 이슈가 됩니다.

"우리 세대에겐 없었던 두려움이 요즘 세대에게 있어요. 얼마 전 젊은 페미니스트들을 만났는데 강남역 살인사건 때 추모글 쓴 메모지를 없애지 못하도록 여성들이 마스크 쓰고 눈만 내놓고 있었대요. 누가 몰카 찍어서 올릴까봐 그랬다는 거예요. 그 공포를 저는 막연하게 생각하는데 그 말을 하는 친구는 순간순간 몸을 떨더라고요. 이화여대 시위 때도 다들 마스크 쓰고 나갔잖아요. 그런 두려움을 가진 여성들이 실제 데이트 폭력이라도 겪으면, 강남역 사건 같은 게 터졌을 때 자기에게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느끼는 것 같아요."

―장관께서 엘리트 코스만 밟아오면서 차별이나 혐오를 덜 받은 게 아닐까요.

"그런 면이 있죠. 차별에 노출됐어도 별로 심각하게 느끼지 않았던 것 같아요. 지금 세대만큼 감수성이 강하지 않았죠. 참고 지나간 경우가 많아요. 지금 세대가 차별에 예민해진 건 좋은 현상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우리 세대가 차별을 덜 느꼈다고 해서 차별이 없었던 건 아니에요. 저는 교수 자리 구할 때 남자 동료들보다 훨씬 나쁜 조건으로 구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주변 여자 동료들도 연구 성과는 남자들보다 높은데도 좋은 대학에 자리를 못 구하는 일이 많았고요."

―한국 사회에서 유독 남녀 갈등이 극으로 치닫는 이유가 뭘까요?

"우리 사회에 군사주의적 문화가 남아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또 성장 중심 사회죠. 예전에 한 대기업에서 낸 광고 문구가 '2등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였어요. 어떤 것에서든 1등을 꼽아야만 하는 사회, 일상적으로 우열을 가려야만 직성이 풀리는 문화가 남녀 간에도 누가 우월한가 따지게끔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2003년 여성 운동가들과 얘기를 나누는 모습(맨 왼쪽). 정현백 여성가족부 장관은 “페미니즘은 여성·남성 모두 젠더 차이로 불행해지지 않는 사회를 지향한다”고 했다.

아직도 아침 차려주는 91세 노모

정 장관 어머니 허숙 여사는 지금도 매일 아침 6시 30분 딸의 아침상을 차려준다. 가사 도우미를 쓰자고 여러 번 얘기했지만 딸에게 받는 생활비가 미안하다며 극구 사양한다고 한다. 정 장관 동생은 "어머니가 '나 죽어야 될 때가 됐다'고 말씀하시곤 했는데 누님이 장관 되니 '장관이 막노동보다 더 힘들다. 딸이 장관 하는 동안 내가 더 힘내서 잘 살아야겠다'고 하시더라"고 했다. 허 여사의 둘째 딸인 정 장관은 든든하면서도 아픈 손가락일 수밖에 없다. "결혼해서 행복하게 사는 사람도 있는데 (딸이) 결혼에 대해 묻지 말고 얘기하지 말라니 마음이 아팠어요. 나랏일 하고 나서는 그래도 덜 우울해졌어요." 호흡기가 좋지 않은 허 여사가 가쁜 숨을 내쉬며 말했다.

―성공한 여성 뒤엔 또 다른 여성의 희생이 있었네요.

"늘 마음의 빚이 있죠. 제가 별로 살림을 챙기지도 못하고, 아침 일찍 나가 밤늦게 오니 평일엔 둘이서 대화하기도 힘들어요. 제가 학교 있을 때는 주말에도 거의 연구실 나갔거든요. 그러면 어머니가 항상 도시락을 챙겨주셨고 가끔 학교 경비하시는 분 간식도 싸주시고 했어요. 결혼은 제가 오십 넘으니 그제야 포기하셨어요. 요즘은 결혼하지 않고 다른 삶을 살아가도 된다고 배워 가시는 것 같아요."

―원래 어머니가 딸에게 기대하던 삶은 무엇이었나요?

"어머니가 그 옛날 진주여고 나오셨으니 교육열이 높으셨어요. 다만 딸은 무조건 이화여대 영문과나 가정대에 가야 한다고 저를 굉장히 괴롭혔어요. 언니는 숙명여고, 저는 이화여고를 나온 이유도 어머니가 '경기여고 나오면 드세져서 시집 못 가거나 이혼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언니는 어머니 바람대로 이화여대 불문과에 갔지만 저는 거역하고 말았지요(정 장관은 서울대 역사교육과를 나왔다)."

―집안이 전반적으로 가부장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관계를 보면 항상 분개했죠. 하지만 아버지가 어머니에겐 가부장적이었어도 자식들은 평등하게 키우셨어요. 저와 언니 이름에도 돌림자를 넣어주셨고요. 딸이라고 공부 덜 시키는 것도 없었어요."

―어머니가 안 계시는 상황도 생각해 보셨나요?

"나중에 혼자 되면 혼자 사는 여성끼리 같이 살거나 할 수 있죠. 미국에서 교수 하는 후배가 일흔 살쯤 되면 그만두고 한국 오겠다고, 같이 살자고 벌써부터 추파를 던지고 있어요. 남편하고 거의 이혼 상태고 딸은 미국에 남아 살겠다고 했거든요."

―독일에서 유학한 경험이 그런 생각으로 이어진 건가요?

"영향을 많이 받았죠. 독일 사람들 약 80%가 이런 생활 공동체를 꾸려본 경험이 있다고 해요. 수입 전부를 함께 쓰기도 하고 생활비를 수입에 따라 모아 쓰기도 하죠. 불필요한 소비는 줄이고 돈을 어떻게 써야 할 것인가 끊임없이 토론하고요. 아직까진 대안적인 생활방식을 실험해 보지 못했는데, 어머니 안 계시게 되면 생각해 보겠죠."

―그런 사회에 눌러앉고 싶은 생각은 없었습니까.

"저는 독일 속 한국에 살았어요. 장학금을 받고 갔기 때문에 한국으로 돌아가서 내 역할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컸습니다. 또 독일에서 결혼해 살게 되면 전업주부로 남게 될 거라는 두려움도 있었어요. 저 좋다고 쫓아다닌 독일인 남학생 하나가 있었는데 열심히 피해 다녔습니다(웃음)."

인터뷰를 마치고 정 장관 집을 나서는 길, 그의 남동생이 마당에서 감을 따고 있었고 조카는 강아지를 품에 안고 산책하고 있었다. 평범한 가족의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