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가 4일 잠정 합의한 내년도 예산안에는 공공부문 일자리, 초고소득자 증세, 최저임금 인상 등 문재인 대통령 공약 실천을 위한 재원이 상당 부분 포함됐다. 대기업으로부터 법인세 등 세금을 추가로 걷고, 국가 재정을 투입해 곧바로 늘릴 수 있는 공무원 규모를 확대하고, 저임금 근로자들의 임금을 인상해 소득주도 성장을 이뤄내겠다는 '문재인식 큰 정부' 구상이 현실화됐다. 이날 예산안이 정부·여당 뜻대로 대부분 관철된 데는 국민의당 협조가 상당 부분 작용했다.
여야 협상 과정에서 막판까지 최대 쟁점이 됐던 문제들은 대부분 문 대통령 대선 공약 관련 예산이었다. 공무원 증원과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정부 지원금, 법인세·소득세 인상, 아동수당 도입, 기초연금 인상 등은 모두 문재인 정부 핵심 정책들이다.
'일자리 대통령'을 표방한 문 대통령은 공공부문 일자리 81만개 창출을 최우선 공약으로 제시했다. 하지만 청년취업률 지표는 외환위기 이래 최악 수준이다. 청와대는 국가 재정을 투입해 공무원 일자리를 5년간 17만4000개 늘리는 데 집중하고 있다. 이를 위해 산술적으로 필요한 매년 3만명의 증가분에는 못 미치지만, 이번 예산을 통해 중앙에서만 올해 7627명보다 증가한 9475명의 공무원이 내년에 증가하게 되면서 청와대는 명분을 챙길 수 있게 됐다.
문재인 정부는 또 핵심 경제 기조로 '공정 경제'를 주창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고소득자 증세를 위한 법인세 인상,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정부 지원금이 예산안에 포함된 것 역시 주요 성과로 보고 있다. 문 대통령은 노동계를 끌어안는 노사정 대타협을 통해 경제 구조 조정을 꾀하겠다는 구상을 밝힌 바 있다. 문 대통령은 대선 때 이 같은 공약 내용을 담은 경제 정책인 'J노믹스'를 발표했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재원 계획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이번 예산안을 통해 재원 조달 방안이 구체화된 것이다.
야당은 당초 "문재인 정부 첫 예산은 무차별적 퍼주기" "세금 나눠 먹기"라며 반대했었다. "내년 예산에 반영해주면 그다음 해에도 또 반영해줘야 한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국회에서 캐스팅보트를 쥐고 있는 40석의 국민의당이 막판에 민주당 주장을 상당 부분 수용하면서, 이번 예산안은 큰 틀에서 문재인 정부가 원하는 대로 됐다. 이날 오전만 해도 여야 간 예산안 합의가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하지만 민주당이 국민의당만을 끈질기게 설득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민주당 우원식 원내대표는 이날 오전 국민의당 김동철 원내대표를 불러내 "도와달라"고 거듭 부탁했다. 그 과정에서 국민의당이 원하는 중대 선거구제로의 개편 추진에 공감을 표시하기도 했다. 이후 협상은 급물살을 탔다.
한국당은 공무원 증원과 법인세 인상에 강하게 반대했지만 총 8개항의 합의문 작성에 참여해 이 두 가지에 대해서는 '유보' 입장을 밝혔다. 한 국민의당 의원은 "우리 당이 민주당 편을 드니까 한국당은 전의를 상실한 것 같았다"며 "이번 예산안 협상은 원하는 걸 거의 다 얻은 민주당의 승리"라고 했다. 대신 국민의당은 협상 과정에서 '실익(實益)'을 상당히 챙겼다는 평가다. 국민의당은 지난달 29일 민주당을 설득해 10여년을 끌어온 호남KTX 무안공항 경유에 합의했다. 변경된 광주~무안~목포 구간 국회의원은 모두 국민의당 소속이다. 국민의당은 새만금개발공사 관련 특별법과 예산안도 얻어냈다. 정부는 새만금특별법이 통과되면 최대 3조원을 출자해 공사를 설립하게 된다. 국민의당 한 호남 의원은 "전체적으로 SOC 예산이 많이 깎였었는데 일부 정상화될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국민의당은 이번 협상 과정에서 예산과 직접 상관이 없는 선거구제 개편안도 거론했다. 국민의당 김 원내대표는 이날 민주당 우 원내대표와 회동을 갖고 내년 지방선거와 개헌 국민투표 동시 실시, 개헌과 함께 선거구제 개편 추진 등에 대해 원칙적으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국민의당은 한 지역구에서 2명 이상을 선출하는 중대선거구제를 선호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