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범벅 잠옷 차림으로 넋 나간 얼굴로 들어서는 루치아. 창백한 그녀는 혼신의 힘을 다해 '오! 하나님'을 외치며 연인 에드가르도를 향한 영원한 사랑을 노래했다. 2일 오후 서울 잠실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도니체티 오페라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루치아 역으로 분한 소프라노 캐슬린 김(42)이 3막 광란의 아리아인 '그의 달콤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를 부른 뒤 바닥에 쓰러지는 순간 절정에 달했다. 공연기획사 아트앤아티스트가 콘서트 형식으로 올린 이날 '루치아'는 유럽 무대에서 활약하는 우리 주역 가수들의 노래 실력을 만끽한 시간이었다. 캐슬린 김은 장장 15분에 걸쳐 고난도 테크닉의 아리아를 끊어질 듯 말듯 처절하게 소화했다.
주인공은 집안의 원수 에드가르도를 사랑하지만 가문의 재건에 눈먼 오빠 엔리코의 꾐에 빠져 정략 결혼한 루치아. 첫날밤 자신이 속은 걸 안 뒤 미쳐 신랑을 찌르는 비운의 여인이다. 하지만 캐슬린 김 외에도 에드가르도 역으로 출연한 테너 박지민(39), 엔리코 역을 맡은 바리톤 김주택(31), 라이몬도 신부로 분한 베이스 박종민(31)까지 이날 무대는 스타 성악가들의 경연장 같았다. 무대엔 오케스트라와 지휘자, 합창단뿐이었지만 노래만으로 극을 완벽히 이끌며 오페라의 진수를 선보였다.
김주택은 가문을 위해 여동생의 진심을 외면하는 엔리코를 실감 나게 그려냈다. 박지민은 딴 남자와 결혼한 연인을 배신자로 몰아붙이는 에드가르도를 능숙하게 표현했다. 박종민은 호소력 짙은 목소리와 품위 있는 연기로 라이몬도 신부를 노래해 갈채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