렉스 틸러슨 국무장관이 곧 물러나고 마이클 폼페이오 중앙정보국(CIA) 국장이 차기 장관이 될 것이라는 뉴욕타임스 보도가 나온 30일(현지 시각), 워싱턴은 하루 종일 술렁거렸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틸러슨 경질 여부를 묻는 기자들에게 "그는 여기 있다. 렉스는 여기 있다"라고 의미를 알 수 없는 짧은 답을 했다.

백악관과 국무부 대변인이 각각 틸러슨 사임설을 강력하게 부인하면서 분위기가 정리되는 듯했다. 하지만 틸러슨 경질설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에게 초지일관 충성해온 폼페이오가 국무장관이 되고, 맥매스터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과 가까운 톰 코튼 상원의원이 CIA 국장이 될 것이란 추가 보도가 이어졌다. 이날 저녁 우연히 만난 트럼프 행정부 고위관리도 "틸러슨 장관이 곧 물러나는 것으로 안다"고 했다. 하지만 여전히 공식 발표가 없는 상태라 유임의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미국 외교의 얼굴이며 지구상의 임명직 중 가장 중요한 자리라는 국무장관이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지난 10개월간 수난의 역사를 썼다. 틸러슨은 국무부 구조조정에 나섰다가 직원들을 적으로 돌렸고, 북핵 문제 등에서 트럼프 외교안보팀 내에서 가장 온건한 목소리를 내다가 트럼프와 불화를 빚었다.

국무부 청사가 있는 지역이 워싱턴의 '포기 보텀(Foggy Bottom)'이다. 틸러슨 장관이 국무부에 구조조정의 칼을 들이댄 이후 수시로 '포기 보텀 괴담'이 흘러나왔다. 지난 열 달 동안 100명 가까운 베테랑 외교관들이 '빛의 속도로' 국무부를 떠났다. 신입 지원자는 평년의 반 이하로 떨어졌다. 차관보 약 20명, 대사 40여 명의 지명이 이뤄지지 않아 대행체제로 버티고 있다. 별명이 '대행(acting) 국무부'가 될 지경이다.

틸러슨 국무장관, 폼페이오 CIA 국장.

고위직 충원이 되지 않으니 국무부 안에 빈 사무실이 많고 일부 복도에는 사무용 가구도 쌓여 있다고 한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주요 외교 현안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가 주도하고 있어 국무부는 보조 역할에 머물거나 정책 결정 과정에서 배제되고 있다는 점이다. 국무부가 예전과 다름없이 열심히 일한다 해도 트럼프 대통령의 트윗 한 번이면 분위기가 확 바뀌니 직원들이 의욕을 가질 이유가 없다고 한다. 사기가 땅에 떨어진 직원들이 일찍 퇴근해버려 오후엔 국무부가 적막강산이란 얘기도 들린다.

보다 못한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국무장관이 30일 워싱턴포스트에 기고했다. 외교관들이 현기증 나는 속도로 국무부를 빠져나가는 현 상황이야말로 '긴급 국가안보 위기'라는 것이다.

국무부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으니 워싱턴 주재 각국 외교관들도 미국 외교정책에 대해 갈피를 잡기 힘들다. 워싱턴의 외국 특파원들까지 영향을 받는다. 이전 정부에선 매일 하던 국무부 언론 브리핑을 트럼프 정부에선 일주일에 한두 번 할까 말까이니 미국 입장을 확인하는데 시간이 더 걸린다. 국무부를 포기하고 백악관으로 출입처를 바꾼 외국 기자들도 있다.

트럼프의 국무부 박대는 지난해 대선 유세 때 이미 예고된 것이었다. 강한 미국을 위해 '군사력 우선'을 외친 트럼프는 외교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대선 때 공화·민주 할 것 없이 대다수 외교·안보 전문가가 초당적으로 '반(反)트럼프' 운동에 서명한 것도 트럼프가 외교관들을 신뢰하지 않는 이유이다. 그에게 외교관은 워싱턴의 기득권 세력이다.

뉴욕타임스 보도대로 틸러슨이 곧 사임하고 '충성'과 '강경'으로 무장한 폼페이오 CIA 국장이 국무장관이 되면 북핵문제는 한 단계 더 강경해질 가능성이 크다. 폼페이오는 북한 정권 교체(레짐 체인지)를 주장해온 인물이다. 지난 7월 아스펜안보포럼에서 그는 "북한에서 핵무기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핵무기 통제권을 가진 사람"이라면서, "이 둘을 분리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당시 CNN은 폼페이오의 이날 발언이 트럼프 정부 내에서 김정은과 관련해 가장 공격적인 의견이라고 했다. 폼페이오는 북핵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CIA 내에 코리아임무센터를 만들기도 했다.

에너지 기업 엑손모빌의 최고 경영자로서 성공신화를 써온 틸러슨은 국무장관으로서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소수의 참모만 데리고 일하는데 익숙했던 틸러슨은 국무부에서도 비슷한 스타일로 일했다. 언론의 막대한 관심 속에서 일하는 걸 몹시 힘들어했다고 한다. 트럼프 대통령과 사이가 벌어지면서 외국에서 신뢰를 얻지 못한 것이 가장 큰 한계로 지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