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경기 일산 대진고 1학년생 김남준군은 '꾼'들 사이에서 소문난 래퍼 지망생이었다. 중학생 때부터 힙합 음악에 빠져 직접 만든 랩과 음악을 힙합 커뮤니티 사이트에 올렸다. 선수들 사이에 알음알음 소문나더니 당시 최고 대중가요 작곡가의 귀에도 이 얘기가 들어갔다.

지오디 '하늘색 풍선', 비의 '나쁜 남자', 백지영 '총 맞은 것처럼' 등 히트곡을 만든 방시혁(45·빅히트 엔터테인먼트 대표)이었다. 김군의 랩을 듣고 단박에 '물건'임을 직감한 방시혁은 자신이 운영하는 기획사 연습생으로 김군을 스카우트했다. 김군을 시작으로 이후 6명의 소년을 추가로 발탁했다. 일산, 과천, 부산, 대구, 광주광역시. 해외파 하나도 없는 토종 국내파, 그것도 '비(非)서울 출신'만 모인 아이돌 그룹이 2013년 꾸려졌다.

그룹명 '방탄소년단'. 구심점이 됐던 그 '고딩 래퍼'는 ‘랩몬스터(현재 RM으로 변경)’란 활동명으로 그룹 리더가 된다. 해외 활동 염두에 두고 영어 이름을 짓는 아이돌 그룹이 넘치는 상황에 특이하게 한글로 무장한 그룹 이름이었다. "아이돌이 무슨 방탄유리냐?" "방시혁이 탄생시킨 소년단?" 이름 갖고 '촌티 난다' '유치하다' 비아냥도 나왔다.

그로부터 4년이 흐른 지금, 더 이상 이 팀의 이름을 갖고 놀리는 사람은 없다. '방탄'은 지금 국내는 물론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팀 중 하나가 됐다. 11월 19일(현지 시각) 미국 3대 음악 시상식 중 하나인 아메리칸뮤직어워즈(AMAs)를 통해 미국 데뷔전을 치렀고, 지난 5월 빌보드어워드에서 미국 최고의 아이돌 스타인 저스틴 비버를 꺾고 '톱소셜아티스트'상을 받았다. 지난 9월 낸 새 앨범은 빌보드 앨범 차트 7위라는 대기록을 달성했다. ABC ‘지미 키멜 라이브’, NBC ‘엘런 디제네러스쇼’ 등 미국 최고의 인기 토크쇼에 출연했다. 트위터 계정 팔로어 수는 1050여만명(28일 현재). 한국 계정 중 제일 많다. 한국 가수 중엔 '강남스타일'의 싸이 말곤 누구도 이르지 못한 위치다.

'방탄'은 지금 국내는 물론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팀 중 하나가 됐다.(좌측부터) RM, 정국, 진, 슈가, 뷔, 제이홉, 지민

'방탄'의 성공 뒤 숨은 막후의 주역이 바로 방시혁이다. 팀을 기획하고 제작했으며, 그 이름까지 지은 '방탄의 아빠'다. RM을 발탁했고, 그를 중심으로 슈가·진·제이홉·지민·정국·뷔 등 전국에서 모은 일곱 소년을 조련했다. 방탄에 대한 세계적 관심은 방시혁에게까지 미쳤다. '방탄'이 인상적인 미국 데뷔전을 치른 직후 빅히트 엔터테인먼트엔 그를 인터뷰하고 싶다는 국내외 언론의 요청이 200건 넘게 쏟아졌다고 한다. 지금, 가요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인물인 방시혁을 AMAs 직후인 11월 20일 미국 LA에서 friday가 단독으로 만났다.

2003년 JYP엔터테인먼트 소속 작곡가이자 프로듀서였던 방시혁(45)은 소속사 대표 박진영과 함께 미국 로스앤젤레스(LA)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두 사람이 제작한 아이돌 가수 'GOD(지오디)'와 '비' 등이 연이어 큰 인기를 끌던 시기였다. 그 성공을 발판 삼아 미국 대중음악 시장에 도전하기 위해 맨몸으로 미국행을 선택한 것이었다. 두 사람은 작은 아파트에 같이 살면서 온갖 음반사를 돌아다니며 음반을 돌렸다. 하지만 이름조차 생소한 한국에서 온 이들에게 미국 시장의 벽은 높았다. 결국 방시혁은 몇 달 뒤 홀로 한국에 돌아왔다.

그로부터 14년이 지났다. 11월 19일(현지 시각) 방시혁은 미국 3대 음악 시상식 중 하나인 아메리칸뮤직어워즈(AMAs) 행사장에 들어섰다. 2005년 자신이 만든 빅히트엔터테인먼트 소속 7인조 보이그룹 '방탄소년단'이 AMAs를 통해 미국 데뷔전을 치르는 현장에 온 것이었다. 대형 연예기획사도 연거푸 고배 마셨던 미국 음악 시장에 방시혁과 방탄소년단이 깃발을 꽂은 셈이다.

AMAs 공연을 위해 방탄소년단과 함께 LA에 온 방시혁 빅히트 엔터테인먼트 대표를 만났다. 방탄소년단 멤버들은 방 대표를 "피디(PD·프로듀서의 준말)님"이라고 불렀다. 방 대표도 스스로 “대표보단 프로듀서란 직함이 더 편하다”고 했다. 흰 셔츠에 카디건을 받쳐입은 모습에서 2010년 MBC 오디션프로그램 '위대한 탄생'에서 보던 '독설가'의 면모는 찾아볼 수 없었다. 방 대표는 아이스커피를 마시면서 "어제 (방탄소년단) 무대 정말 감동적이지 않았어요? 저는 애들이 이 정도로 잘해낼지 몰랐어요"라고 말했다.

방시혁 빅히트 엔터테인먼트 대표.

- 이 정도로 성공할 것을 기대했는가.

"방탄소년단이 잘 될 것이라는 믿음은 있었다. 그래도 이 정도까지 빠르게 성장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올 한해는 그냥 어안이 벙벙한 채로 지나가는 것 같다."

- 방탄소년단이란 팀은 어떻게 만들었나. 이름이 유치하다는 지적도 많은데.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방시혁이 탄생시킨 소년단'이라는 뜻은 절대 아니다(웃음). 미국에서는 흔히 쓰이는 'Bullet Proof'(총알 보호장치·방탄)이라는 의미를 통해 10~20대 청춘의 고통, 압박감을 우리가 막아주면 어떨까 싶어서 붙였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유치하다고 하더라(웃음). 방탄소년단은 리더인 RM으로부터 시작된 그룹이다. 7년쯤 전에 ‘랩하는 친구 중에 굉장히 주목받는 친구가 있다’고 해서 만나 보니 실력이 엄청나더라. 그래서 이 친구를 중심으로 힙합 크루(Crew·힙합 음악에서 일종의 팀을 가리키는 말)를 만들어볼까 하다가 아이돌이 더 적합하겠다 싶어서 다른 멤버들을 모아서 방탄소년단을 만들었다."

- 요즘 아이돌 그룹엔 한두 명은 해외파가 들어 있는데, 독특하게 멤버들이 전부 비(非)서울 토종들이다.

"의도적으로 서울 출신을 배제한 건 아니었다. 방탄소년단을 구성할 때 콘셉트가 '본인의 이야기를 하고, 시대를 대표하는 친구들'이었다. 이런 콘셉트에 맞춰서 모으다 보니 지금의 7명이 함께하게 됐다."

- 그룹 이름도 그렇고, 기획 단계부터 세계 시장을 겨냥했다고 보이진 않는다.

"정확하다. '향후에 글로벌로 나아가야지'라는 생각은 했지만, 기획 단계부터 해외 시장을 공략한 건 아니었다. 대신 우리가 만드는 음악은 인종, 국가 상관없이 청소년, 젊은이들이 모두 공감할 수 있도록 하자고 생각했다. 이게 해외에서도 먹힌 것 같다. 과거 사례만 봐도 해외팬들은 음악과 멤버들만 좋으면 그룹 이름과 무관하게 자기네들끼리 별명을 붙여서 부르지 않았나. 방탄소년단을 줄인 'BTS'라는 영어 약칭은 해외 팬들이 만든 것이다."

11월 27일(현지 시각) 미국 인기 토크쇼 ‘엘런 디제네러스쇼’에 출연한 방탄소년단.

- 기존 아이돌 그룹과 차별화된 지점은 결국 노래의 메시지라는 분석이 나온다. 한 주제에 집중하는 '연작' 콘셉트의 앨범도 그렇고.

"지금 아이돌 가수들의 음악은 너무 '즐기는' 데 집중한다는 생각이 든다. 방탄소년단은 반대로 갔다. 일부러 즐겁고, 행복한 음악보다는 이 시대의 젊은이들이 겪는 가혹한 현실과 그에 대한 고민을 노래하는 데 포인트를 맞췄다. 처음에 멤버들한테 곡, 가사를 써오라고 하니까 다들 과시하는 내용만 써오더라. 다 ‘빠꾸’ 시켰다. 무조건 너희들의 이야기를 쓰라고 했다. 그게 유치해 보이지만, 또래 청년들이 더 공감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본인들의 이야기로 음악을 만들다 보니 자연스럽게 '연작', '성장' 같은 콘셉트도 만들어진 것 같다."

- 트위터 같은 소셜미디어를 적극 활용한 것은 계산한 것 아니었나.

"소셜미디어가 방탄소년단의 인기에 엄청나게 큰 몫을 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기획사에서 억지로 시켜서 소셜미디어를 했다기보다는 멤버들이 데뷔 전부터 자발적으로 썼다. 연습생 때부터 휴대전화 못 쓰게 하는 식의 통제를 하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다른 젊은이들처럼 방탄소년단 멤버들도 자연스럽게 ‘트위터 덕후(마니아라는 뜻의 은어)’가 됐다. 멤버들이 완전히 네티즌처럼 소셜미디어를 쓰니까 팬분들도 더 좋아하는 것 같다. 유튜브 역시 마찬가지다. 지금 가장 트렌디한 음악을 접할 수 있는 창구는 단연 유튜브다. 우리도 우리의 음악과 뮤직비디오를 유튜브에 올린 것이고, 여기서 팬분들이 처음 방탄소년단을 접하게 됐다. 멤버들이 팬분들과 소셜미디어로 실시간 소통하면서 팬분들이 더 늘어난 것 같다."

방탄소년단이 팬을 지칭할 때 꼬박꼬박 ‘팬분들’이라고 지칭했는데 방시혁도 마찬가지였다.

11월 19일(현지 시각) 미국 ‘아메리칸뮤직어워즈’에서 축하 공연을 하고 있는 방탄소년단.

- 방탄소년단의 성공 요인을 간단하게 정리해본다면.

"소셜미디어의 힘에 더해서 기본적으로 K팝 특유의 트렌디함과 퍼포먼스가 있었다. 거기에 서구권 아티스트들처럼 음악에 자신의 이야기를 녹여냈다는 점 같다. 예전에 '아이 니드 유(I need you)'라는 곡을 냈을 때, 일부러 뮤직비디오를 좀 강하게 만들었다. 청춘이 그만큼 아프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다. 유튜브에 올라간 뮤직비디오 댓글을 보면 세계 각지의 언어로 '자살하고 싶었는데 힘이 났다'는 댓글이 많이 달렸더라. 이런 공감과 소통이 성공 비결 아닐까."

방시혁 대표는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손꼽히는 작곡가이자 프로듀서다. 서울대 미학과 출신인 그는 중학교 시절 밴드 활동을 하면서 음악에 발을 들여 놓았다. 대학 재학 중이던 1994년 감성적인 포크 음악 싱어송라이터를 주로 선발하는 ‘유재하 가요제’ 동상을 받았다. 이후 직접 만든 곡을 녹음한 데모테이프를 만들어 돌리기 시작했는데, 우연히 그의 노래를 들은 박진영이 그를 스카우트했다. 방시혁은 “그 전까진 국내 가요도 많이 안 들어봤고, 가요계 인맥도 거의 없었는데 진영이 형이 먼저 연락해준 것은 엄청난 행운이었다”며 “드라마틱한 계기보단 얼렁뚱땅 작곡가의 길을 걷게 된 것 같다”고 했다. 얼렁뚱땅 시작한 것치곤 엄청난 성공이다. 2000년대 초반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5인조 보이그룹 지오디는 그와 박진영이 발굴한 가수다. 백지영의 ‘총 맞은 것처럼’, 비의 ‘나쁜 남자’ 등 수많은 히트곡을 쓴 인기 작곡가이기도 하다.

- 서울대를 나온 엘리트에 포크 음악 위주인 유재하 가요제 출신이다. 과거의 경력과 지금 음악 사이에 거리가 꽤 있어 보인다.

"나의 아이덴티티(정체성)는 '상업 작곡가'다. 그래서 (상업성과 다소 거리가 있는) 유재하 가요제에 나가는 것도 고민이 많았다. 당시에도 상업적인 색이 강한 알앤비(R&B) 음악으로 수상한 것이고. 이렇게 보면 나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상업 작곡가의 길을 걸어온 것이다."

- 상업 작곡가라는 의미는 뭔가.

"아티스트는 본인의 취향을 대중에게 설득시키고, 감동시키는 음악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 같은 상업 작곡가는 대중의 취향에 철저하게 맞춘 음악을 만드는 게 가장 우선이다. 시대가 좋아하는 음악, 트렌디한 음악이 내 목표다. 대표적인 것이 방탄소년단의 '피, 땀, 눈물'이라는 곡이다. 라틴 팝 음악과 트로피컬 하우스(밝고 흥겨운 느낌의 전자음악 장르의 일종) 음악이 글로벌 시장에서 인기를 얻어가는 시기에 맞춰서 우리가 빠르게 만든 것이다.”

- 음악적인 영감(靈感)은 어디서 얻나.

"영감이라는 단어는 좀 맞지 않는 것 같다. 나는 음악은 ‘엉덩이가 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작업실에 오래 붙어 앉아서 다양한 음악을 많이, 오랫동안 들어야지 좋은 음악을 만들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제일 많이 보는 게 유튜브다. 클럽 가고, 길거리 나가서 젊은 친구들 만나서 이야기하는 것보다 유튜브에서 아프리카 음악부터 발칸반도 음악까지 듣는 게 훨씬 도움이 된다."

- 그렇다면 상업 작곡가로서 앞으로 대중음악 시장 흐름은 어떻게 될 것으로 보나.
 
"먼저 내 음악의 기본은 서구 음악이다. 평생을 미국 음악에 노출된 상태로 살아왔다. 이를 기반해서 본다면 당분간 히스패닉 계열의 라틴 팝 음악이 아주 압도적이라고 생각한다. 또 한 가지 꼽는다면, 장르의 믹스쳐(mixture·혼합)'다. 예전에는 힙합과 EDM(전자댄스음악)은 상극이라고 했는데, 지금은 둘을 결합한 음악도 엄청나게 많이 나온다. 방탄소년단이 이번에 낸 '디엔에이(DNA)'도 이런 흐름을 잇는 곡이다. 이렇게 경계가 무너지는 과정에서 라틴 팝이 베이스를 이루는 음악이 주류로 올라가는 것 같다."

- 그렇다면 대중음악 시장에서 살아남는 음악은 어떤 음악이라고 보는가.
 
"살아남는 게 큰 의미가 있을까? 잠깐 소비되고 사라져도 결국 그 나름대로 가치가 있는 것 아닐까 싶다. 대신 우리가 하고 싶은 음악은 누군가의 추억 속에서 살아남는 음악이다. 서울 정동길에만 가면 생각나는 이문세의 '광화문 연가' 같은."

- 요즘 인공지능(AI)이 작곡가 같은 창작자의 영역도 대체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AI가 작곡한 곡에 대해서 들어봤다. 정말 잘 만들더라. 개인적으로는 AI가 음악 창작 영역에서도 상당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가수, 프로듀서, 작곡가의 역할은 AI가 만든 음악을 어떻게 취사선택하고, 조율할지를 결정하는 것 아닐까 싶다."

방탄소년단의 ‘아메리칸뮤직어워즈’ 축하공연에 환호하는 미국 팬들.

- 오랫동안 한솥밥을 먹었던 JYP엔터테인먼트 박진영 대표의 반응이 궁금하다. 부러워하진 않았나.

"절대. 진영이형은 이런 거로 질투하거나 하는 사람이 아니다. 내가 가장 멋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방탄소년단이 이렇게 성공했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났던 사람이 진영이형이었다. 처음 빌보드어워드에서 상 받았을 때 제일 먼저 통화한 사람도 진영이형이었고, 이번 AMAs 올 때도 공항에서 진영이형이랑 통화했다. 형이 '정말 대견하다. 고맙다. 멋있다'고 하더라."

- 가요계에선 '방탄소년단 이후'에 대한 관심도 많다.

"준비는 하고 있지만, 지금 언급할 단계는 아니다. 방탄소년단에 집중하는 게 우선이다."

- 향후 목표는?

"모델링(modelling). 앞으로 제2, 제3의 방탄소년단을 위해서라도 방탄소년단이 걸어온 길을 분석해 ‘성공 공식’을 만드는 거다. 지금 당장은 ‘이렇게 하면 방탄소년단처럼 성공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할 순 없지만, 내년 정도엔 내놓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SM의 이수만 선생님이 보아를 일본 시장에 진출시키면서 만든 성공 공식을 따라 많은 한류 그룹이 생긴 것처럼 방탄소년단이 미국과 다른 해외 시장에서의 성공 공식을 만들 거다."

방시혁과 방탄소년단.

◆ 방시혁이 꼽은 방탄 성공 공식

1. 자기 이야기를 하다

"10~20대들이 받는 고통이나 압박감, 학교 폭력같이 그들 또래의 피부에 와닿는 주제를 노래했다."

2. K팝의 원칙을 지키다

"언어 장벽을 보충해주는 게 퍼포먼스와 비주얼. 잘생기고, 멋진 춤을 추고 끼를 보여주는 것. 만국 공통으로 통한다."

3. 팬의 눈높이를 맞추다

"소셜 미디어를 제재하지 않았다. 마음대로 해보라고 풀어줬다. 그 또래 평균처럼. 팬들은 스타가 자기처럼 소셜 미디어를 쓰니까 친근함을 느꼈다."

4. 마케팅보다 콘텐츠

"그 또래 청춘의 이야기를 쭉 따라가다 보니 ‘성장’이란 키워드가 나왔다. 청춘이 성장하는 것처럼 방탄소년단도 성장 자체가 그들의 콘텐츠로 연결됐다."

방시혁

1972 서울 출생

1991 서울대 미학과 입학

1994 제6회 유재하가요제 동상 입상

1997 JYP엔터테인먼트 작곡가로 영입

1999 지오디 ‘하늘색풍선’ 등 작곡

2005 빅히트 엔터테인먼트 창업

2011 제1회 한국음악저작권대상 작품상

2013 빅히트 소속 방탄소년단 데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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