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희 TV조선 기상 캐스터

목요일 밤늦은 퇴근길에 함박눈이 펑펑 쏟아졌습니다. 포근한 솜 같은 눈은 이맘때라서 볼 수 있어요. 지금보다 더 추워지면 얼음 알갱이가 세찬 바람결에 툭툭 떨어지는 싸락눈이 내리지요. 공기가 많이 차갑긴 해도 견딜 만한 추위였습니다. 눈 오는 세상이 아름다워 한참을 걸었네요.

영화 '뷰티 인사이드'의 한 장면이 생각났습니다. 얼마 전 우리 곁을 떠나간 배우 김주혁이 주인공을 맡았던 영화죠. 날마다 외모가 달라지는 남자와 사랑을 나누는 여자 이야기입니다. 영화 마지막쯤 남녀가 함박눈 쏟아지는 거리를 걷는 장면이 나와요. 남자가 이별을 선언하리라 직감한 여자는 "함박눈이 너무 예쁘니 동네를 더 오래 걷자"고 합니다. 하지만 결국 작별 인사를 피하지 못하죠. 낭만적 설경 속에서 이별은 더 슬프고 아련하게 다가옵니다.

저의 퇴근길 눈 오는 밤 풍경이 영화 속 그 장면과 닮은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나지막이 내리는 커다란 눈송이, 도톰한 모직코트 차림 정도면 견딜 만한 추위, 가을과 헤어지기 아쉬워서 거리를 더 오래 걷고 싶은 제 마음도 비슷했어요. 하반기 유독 바빠져 정신없이 보냈더니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 훌쩍 가 버리네요. 물론 내년에 다시 올 가을이지만, 이별이란 언제나 슬프고 서운한 일이니까요.

최근 시 에세이 책을 낸 선배가 조병화의 시 '헤어지는 연습을 하며'를 문자로 보내줬어요. 어떤 아름다운 것도 결국 이별을 한다고. '세상에 와서 알아야 할 일은 떠나는 일'이라며 '떠나는 연습을 하며 사세'라고 권합니다. 헤어지는 연습이란 결국 지금 이 순간에 온전히 집중하는 것. 계절이든, 인연이든, 일이든 이별할 때 미련 없이 보낼 수 있는 방법은 곁에 있을 때 최선을 다하는 것 아닐까요.

그래서 아직 우리 옆에 남아 있는 늦가을 향기에 집중해 봤어요. 함박눈 내려앉은 은행나무도, 가을 빛깔 햇살도 눈에 담아뒀습니다. 11월의 마지막 주말입니다. 중부지방에 눈과 비가 예상되지만 내일 기온이 크게 올라 금세 녹을 것 같아요. 날짜도, 날씨도 가을에서 겨울로 향하는 길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