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행정부의 20일(현지 시각) 북한 테러지원국 재지정 발표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특사로 평양을 방문했던 쑹타오 중국 공산당 대외연락부장이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을 만나지 못한 채 '빈손'으로 귀국한 지 약 7시간 만에 나왔다. 중국을 통해 북한을 대화의 테이블로 끌어내려 했지만 성과를 내지 못하자 미국이 9년 만에 테러지원국 재지정이라는 칼을 꺼낸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6일 트위터를 통해 '중국이 북한에 특사를 보낸다. 큰 움직임이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보자'며 기대감을 표시했었다.
테러지원국으로 지정되면 수출관리법과 무기수출통제법, 해외원조법 등 3개의 미 국내법에 의해 해당국에 대한 제재가 대폭 강화된다. 테러지원국에 대한 무기 수출과 판매는 물론 민·군(民·軍) 양쪽으로 쓸 수 있는 전자·통신 장비의 수출, 인도적 물자를 제외한 금융 지원 등이 금지된다.
북한은 이미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제재와 미국의 독자 제재 등 이중 삼중의 제재를 받고 있어 이번 조치로 인한 경제적 타격은 제한적일 수 있다. 그러나 미국이 북한을 공식적인 '불량 국가'로 낙인찍으면서 "북한과 거래하지 말라"는 강력한 경고를 국제사회에 보내는 의미가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내일(21일) 재무부가 매우 큰 추가 제재를 발표할 것"이라며 경제·외교 등을 총동원한 전방위 압박을 예고했다. 미 재무부는 일단 북한과 거래한 중국 기업과 무역 회사, 개인 등에 대한 광범위한 제재를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틸러슨 국무장관은 "북한에 휘발유 부족 현상이 생기는 등 제재가 이미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고 했다.
이번 테러지원국 지정은 지난 2월 북한 김정은의 이복형인 김정남 암살 사건과 지난 6월 북한에 억류됐다 송환된 뒤 숨진 대학생 오토 웜비어 사건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백악관 각료회의에서 "북한은 외국 영토에서 암살 등을 포함한 국제 테러를 지원하는 행동을 되풀이했고, 멋진 젊은이였던 오토 웜비어와 북한의 탄압에 잔인한 일을 겪은 수많은 이들을 생각하게 된다"고 했다.
미 의회의 압박도 역할을 했다. 미 의회는 지난 8월 대북제재법을 통과시키면서 "90일 안에 테러지원국 재지정 여부를 통보해달라"고 했었다. 에드 로이스 하원외교위원장은 이날 성명을 내고 "이번 결정에 박수를 보낸다"고 했고, 코리 가드너 상원 외교위 동아시아·태평양 소위원장 등 10명에 가까운 의원들도 환영 성명을 냈다.
백악관은 이미 이달 초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지정할 결심을 굳히고 북·중 간 접촉을 지켜봐온 것으로 알려졌다. 백악관 고위 관계자는 트럼프 대통령의 아시아 순방 기간에 수차례 "북한이 과거에 테러지원국이었다는 점을 잊지 말라"며 "테러지원국을 핵 폐기 조건부로 해제해 줬지만 북한은 이를 지키지 않았다"고 했다.
미국 언론들은 이번 조치를 대체로 환영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사설에서 "2008년 북한을 테러지원국에서 해제시킨 것은 큰 실수였다"며 "북한의 핵무기를 깨뜨릴 유일한 방법은 모든 전선에서 강하게 쥐어짜는 것"이라고 했다. 반면 뉴욕타임스(NYT)는 "(이 조치가) 핵 협상을 압박하는 강력한 새 지렛대가 될지, 아니면 트럼프와 김정은 간의 '말의 전쟁'을 심화할지 불투명하다"고 했다.
우리 정부는 미국 정부의 북한 테러지원국 재지정 방침에 대해 "미국의 국내법적인 절차에 따른 재지정이란 점과 대화를 위한 길은 항상 열려 있다는 점을 강조해달라"는 의견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테러지원국 재지정에 반대하지는 않지만 대화의 가능성도 함께 언급해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미국 국무부는 1987년 대한항공(KAL) 858편 폭파가 북한 공작원 소행으로 밝혀짐에 따라 이듬해 1월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지정했다. 북한은 2000년대 북핵 6자회담에서 방코델타아시아(BDA)은행 제재 해제와 함께 테러지원국 해제를 핵심 요구 조건으로 내걸 정도로 이 제재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
2008년 6월 26일에는 핵 검증 합의에 따라 당시까지 추출한 플루토늄양과 사용처를 명시한 핵 신고서를 6자 회담 의장국인 중국에 제출했고, 이튿날 영변 원자로 냉각탑을 폭파시켰다. 그 넉 달 후인 10월11일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북한을 테러지원국에서 해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