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는 자만 살아남는다.' 내년 러시아월드컵을 앞두고 옥석 가리기에 한창인 신태용 축구대표팀 감독이 선수들에게 팁을 전한다면 이런 말을 할 것 같다. 32세 노장이지만 달리고 또 달리며 월드컵 대표팀의 핵심으로 자리 잡은 이근호(강원FC)가 그 증거다.

이근호는 신태용 감독이 21일 발표한 E-1 풋볼 챔피언십(동아시안컵에서 명칭 변경) 대표팀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염기훈(34·수원 삼성)에 이어 팀 내 둘째로 나이가 많다. 이근호는 지난 7월 신 감독이 부임한 이후 유럽파로만 채웠던 10월 유럽 원정 명단을 제외하면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대표팀에 승선했다.

축구 국가대표팀의 이근호(오른쪽에서 둘째)가 지난 10일 콜롬비아와 벌인 평가전의 전반전에 슈팅을 시도하고 있다. 팽팽한 허벅지 근육과 핏줄 선 팔뚝이 그의 집중력을 보여준다. 한국은 이 경기에서 2대1로 이겼다.

신 감독은 평소 "월드컵에선 우리가 제일 약하다. 상대보다 한 발 더 뛰는 축구를 하겠다"고 말해왔다. 이근호는 신 감독이 말한 '뛰는 축구'의 상징 같은 존재다. 그는 이달 중순 콜롬비아·세르비아와 치른 평가전에 모두 출전해 진가를 발휘했다. 상대 뒤 공간을 파고들기 위해 수시로 가속 페달을 밟았고, 상대 공격 땐 최전방 수비수로 변신해 압박했다. 이근호의 종횡무진 활약은 한국 팬들의 마음도 돌려놓았다. "예전 근성 있는 한국 축구로 돌아왔다" "이렇게만 뛰어주면 지더라도 뭐라 하지 않겠다"는 반응이 이어졌다. 그의 헌신은 후배들의 투지를 이끌어냈다. 최악의 부진에 빠졌던 한국 축구는 이 두 경기로 극적인 반전을 이뤘다.

"힘들지만 모두가 한 발씩 더 뛰었습니다. 기술적인 부분은 둘째였습니다." 콜롬비아전 2대1 승리 직후 이근호는 말했다. 그는 세르비아전(1대1 무)이 끝나고서도 "상대보다 조금씩 더 뛰려고 했던 모습이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다줬다"고 했다. '한 걸음 더' '열심히'와 같은 식상한 단어가 이근호에겐 반드시 실천해야 하는 금언(金言)이었다. "많이 뛰지 못한다면… 은퇴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게 제 장점이니까요."

사실 올해 초까지만 해도 이근호는 러시아월드컵과 거리가 먼 선수였다. 점유율을 중시하면서 짧은 패스와 기술 위주의 축구를 추구했던 전임 울리 슈틸리케(독일) 감독은 상대적으로 투박한 스타일의 이근호를 외면했다. 하지만 대표팀이 월드컵 예선에서 위기를 겪고 '한국 축구에 투지가 사라졌다'는 주장이 나오면서 다시 이근호가 언급됐다.

마침 그도 K리그에서 '대관령 테베스'로 불릴 만큼 활약하며 예열을 마친 상태였다. 신 감독의 호출을 받은 그는 쟁쟁한 해외파 경쟁자들 사이에서 '많이 뛰는 축구'로 경쟁력을 찾았다. 고성능 제트기 사이에서 쌍발 엔진 경비행기가 경쟁하는 격이지만, 한국 축구가 잃어버렸던 가치를 다시 끄집어낸 이근호의 러시아행 가능성은 크다.

그가 '뛰는 자의 가치'를 실현한 덕에 대표팀 다른 자리도 뛰는 축구에 능한 선수들로 채워지고 있다. 신태용호(號)에 처음 발탁된 공격수 진성욱(24·제주)은 폭발적인 스피드를 바탕으로 전방을 휘젓고 다니는 유형이고, 미드필더 김성준(29·성남) 역시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궂은일을 하는 '마당쇠' 스타일이다.

한국 대표팀 선수들은 오는 27일 울산에 조기 소집돼 훈련을 시작한다. 이어 내달 6일 일본으로 출국해 도쿄 아지노모토 스타디움에서 9일 중국, 12일 북한, 16일 일본과 차례로 맞붙는다. E-1 챔피언십은 2년마다 열리는 동아시아 강국 간의 대표팀 친선대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