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서 전시 때문에 서울에 잠시 들른 강이연에겐 작업실이 없다. 서울 한남동 숙소에서 그는 여러 대 컴퓨터와 프로젝터를 놓고 전시 마지막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이 기계들을 밤새 켜놓으면 뜨끈뜨끈해서 보일러도 필요 없다”고 했다.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지던 2013년 9월 어느 날 새벽이었다. 당시 미디어 아트 작가이자 대학 강사로 일했던 서른두 살 강이연은 영국왕립예술학교(RCA) 박사 학위 과정에 입학 허가를 받고 이삿짐을 싸고 있었다. 서울 이태원동 작업실에는 그가 전시 때 썼던 400㎏짜리 LED와 강화유리로 만든 설치작품이 있었다. 인부들이 끙끙거리며 화물차에 겨우 작품을 실었다. 그들은 나머지 짐을 가지러 들어가면서 강이연을 불러 화물차 옆에서 짐을 보고 있으라고 했다. 그때였다. 거짓말처럼 화물차 위에 묶여 있던 400㎏짜리 LED 덩어리가 강이연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느슨하게 묶였던 끈이 풀려 버린 것이다. 정신 차렸을 때 그는 설치물 아래 깔려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온 동네 주민이 소리를 듣고 뛰쳐나왔고 119 대원이 출동했다. 남자 서너명 명이 달라붙어 겨우 설치물을 들어올렸다. 사람들이 그를 황급히 꺼내 앰뷸런스로 옮겼다. 다리뼈가 으스러져 걸을 수 없는 상태였다. 대원 중 누군가가 강이연에게 쉴 새 없이 이름·나이·주민등록번호를 물었다. 까무러쳐 혼절할까 걱정됐기 때문이다. 강이연은 그때 이렇게 외쳤다. “저 괜찮아요! 5일 뒤에 비행기 타야 돼요. 가서 해야 할 일이 있어요!” 그는 그러나 예정된 비행기를 타지 못했다.

2년 뒤, 165년 역사를 자랑하는 영국 런던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미술관(V&A)은 강이연을 ‘레지던시 작가’(Samsung Korean Digital Art Residency)로 선정했다. 미술관 소장품을 마음껏 찾아보고 새 작품을 만들 수 있도록 도와주는 한편 연구와 작업에 필요한 비용을 지원해 주는 제도다. 한국인이 V&A 레지던시 작가가 된 건 처음이었다. 2016년 V&A는 강이연 작품을 구입해 영구 소장키로 했다. 이탈리아 의류 회사 막스 마라(Max Mara)도 오는 29부터 2주일 동안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여는 전시에서 강이연에게 미디어 아트 기획을 맡겼다. 작품에 깔려 다리뼈가 으스러졌던 강이연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지난달 서울에서 만난 강이연은 “그저께 영국 RCA에서 박사 학위를 따고 돌아오는 길”이라고 했다. 치마 아래 드러난 다리엔 흉터가 있었다.

―이젠 잘 걷나 보죠.

“네, 철심 박는 수술을 했어요. 재활치료는 따로 못 했어요. 바로 영국에 갔으니까요. 학교 다니고 작업하려면 어쩔 수 없이 계속 걸어야 해요. 혹독하게 몸을 계속 움직일 수밖에 없었는데, 1년 뒤 한국 가서 만난 의사 선생님이 ‘뭐 하고 왔느냐’고 하더라고요. ‘회복이 놀랍도록 빠르다’면서요. 사고 일 년 후에 철심도 뺐죠.”

―수술하자마자 영국에 갔다는 건가요.

“휠체어 타고 갔죠. 엄마가 보통 분이 아니세요. ‘하고 싶은 공부 못 하고 집에 갇혀 지내는 게 아픈 것보다 더 힘들다’고 투정했더니 엄마가 ‘그럼 지금 가’ 하더라고요. 그 말에 휠체어 끌고 비행기를 탔어요. 급하게 계약한 아파트는 3층이었는데 엘리베이터도 없었어요. 계단을 기어서 올라다녔죠. 학교에선 입학하자마자 유명해졌어요. 가뜩이나 제 전공에는 동양인이 잘 안 들어오는데, 웬 휠체어 끌고 목발 짚고 다니는 한국 여자애가 들어와 학교를 휘젓고 돌아다니니 그럴 만했죠(웃음).”

강이연은 예원학교·서울예고·서울대 미대 출신이다. 독학으로 예원 입시를 준비했다. 중학교 전에는 선행학습은 거의 해본 적이 없다. 예원학교 입학하고 나서야 ‘호랑이(tiger)’나 사자(lion)’의 영어 철자를 못 읽는 게 자기뿐이라는 걸 알았다고 했다. 재수 끝에 미대를 갔지만 어느 순간부터 새하얀 사각 평면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 갑갑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 무렵 영상 작업을 알게 됐다. 카메라로 사물을 찍고 이를 컴퓨터로 편집만 잘하면 사각을 벗어난 다양한 공간을 캔버스로 활용해 작품을 만들 수 있겠다 싶었다. 당시 서울에선 제대로 된 수업이 많지 않았다. 때마침 관정 이종환 교육재단에서 장학금을 받았다. 그 돈을 쥐고 2007년 미국 UCLA 미디어 아트 석사과정에 입학했다. 영어 몇 마디 제대로 말하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미국 유학 시절 스트레스로 종종 호흡곤란까지 겪었다면서요.

“전공 학생 8명 중 4명이 미국인, 3명이 캐나다인, 한 명이 저였어요. 저만 영어를 못했던 거죠. 학교에선 아티스트가 되려면 자신의 작품을 직접 말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면서 종종 전 학과생을 모아놓고 대강당에서 프레젠테이션을 시켰어요. 영어도 못하는데 발표까지 계속 시키니 죽겠는 거죠. 며칠 밤새워서 미리 써놓은 대본을 외우고 또 외워도 식은땀이 났어요. 숨이 제대로 안 쉬어졌고 툭하면 위경련도 일었죠. 터널 지나는 심정으로 버텼어요. 이젠 공부할 때 필요한 영어, 일할 때 필요한 영어는 그래도 좀 하겠는데, 여전히 술집이나 파티에서 사람 만날 때 주고받는 영어(social English)는 쉽지 않아요. 누가 말 걸면 아직도 도망치고 싶죠(웃음).”

한국으로 돌아와 대학에서 학생 가르치는 일을 했다. 한창땐 강의를 한 학기에 5~6개씩 맡았다. 다들 ‘잘 적응하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또다시 갑갑했다. 앞에 놓인 길이 평탄하지만 뻔하게 느껴졌다. 남들이 안 걷는 길을 가보고 싶었다. 그동안 번 돈을 모아 다시 유학을 준비했고 영국 RCA 박사과정에 합격했다. 그렇게 떠나려 할 때쯤 다리뼈가 으스러진 것이다. 강이연은 “그래도 그 덕에 인생관이 바뀌었다”고 했다.

―어떻게 바뀌었다는 거죠.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정말 감사하다고요. 그날 돌아보면 자칫 죽을 수도 있었어요. 살아서 기어다니는 게 어디예요. 그러다 좀 더 나아서 걷게 되니 또 이게 어디예요. 수술이 잘된 게 또 어디예요. 감사할 일투성이죠. 공부하기 힘들다, 영어 못해서 왕따다, 동양인이라서 비주류다. 이런 건 다 ‘그래도 나는 살아있다’는 명제 앞에선 하찮은 핑계일 뿐인 거예요(웃음).”

휠체어에서 벗어나 슬슬 목발 짚고 다닐 때쯤 V&A 미술관에서 레지던시 작가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게 됐다.’이건 꼭 해야 되겠다’ 싶었다. 레지던시 작가로 뽑히려면 V&A 미술관을 위해 어떤 연구 성과를 내거나 창작을 할지 발표해야 한다. 매일 V&A 곳곳을 뒤지다 ‘서양 모조품 방(The Cast Court Gallery)’ 앞에서 멈춰 섰다. 미켈란젤로 다비드상 같은 14~16세기 르네상스 시대 유명 작품과 건축물의 모조품을 모아놓은 곳이다. 그전에도 숱하게 지나쳤던 방이었다. 그 앞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 디지털 작품도 따지고 보면 오리지널이 없는 복제품 아닌가. 복제품과 복제품이 만나 누구도 보지 못한 진짜가 되는 장면을 보여주면 어떨까.’ 그는 이를 설득하는 자료를 책으로 엮어 V&A에 제출했고 레지던시 작가로 뽑혔다.

―작업 과정은 그럼 수월했나요.

“아뇨(웃음). 제 작업이라는 게 ‘프로젝션 매핑(Projection Mapping)’이거든요. 어떤 건물이나 공간에 제가 디지털로 작업한 영상이나 이미지를 비춰 전혀 새로운 곳처럼 보이도록 하는 거예요. 마치 문이 다시 생기고 창문이 돋아나는 식의 환영(幻影)을 구현하는 거죠. 제가 그걸 하겠다고 했더니 큐레이터들은 좋아하지만 그 방을 오래 관리해온 5개 부서 사람들은 걱정이 많았어요. ‘그 과정에서 작품이 상하면 어쩌냐’ ‘그 안에 기계는 어떻게 들여놓느냐’. 이분들을 일일이 돌아다니면서 안심시키고 또 설득해야 했어요. 매일 출근해서 만나는 분들마다 인사하고 제가 무슨 일을 하러 왔는지 붙들고 줄줄 소개했죠. 다들 나중엔 제 얼굴만 보면 도망갈 정도였어요. ‘어우, 쟤 또 와서 말 건다. 그냥 일하게 해주고 도망가자’ 했던 거죠(웃음).”

6개월 작업 끝에 모조품 방에서 전시를 열었다. 첫날에만 1000여 명이 몰렸다. 모조품 방에 놓인 건축·조각 복제품 위에 강이연이 작업한 이미지를 투영(投影)하자 건축물이 와르르 무너졌다가 다시 일어서는 착각이 절로 드는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관람객들은 “이런 건 처음 본다”고 했다. V&A 측은 결국 이런 강이연 작품을 사들여 영구 소장하기로 결정했다.

강이연은 오는 29일부터 열리는 12월12일까지 서울 DDP막스마라 전시에서도 돔 형태 공간에서 디지털 이미지를 쏠 때 빚어지는 착시 효과를 관객에게 보여주겠다고 했다. 때론 벽에서 사람이 튀어나올 듯하고, 때론 돔을 쌓아올린 벽돌이나 그림이 표변할 것이라고 했다. 강이연은 “이를 통해 ‘당신이 보고 믿는 것이 꼭 정답이 아닐 수도 있다’는 메시지를 주고 싶었다”고 했다.

―눈앞에 보이는 영상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 없으니까요?

“그렇죠. 저는 평면에 그림을 쏘는데 어떤 공간과 만나면 3D나 4D처럼 보이거든요. 평면이 평면이 아닌 거죠. 실제 사람이나 사물을 영상으로 찍어서 벽에 쏴도 환상처럼 보여요. 실제와 환상의 경계가 모호한 거죠. 세상일이 다 그렇지 않은가요. 좌우도, 위아래도, 참과 거짓도. 어느 한쪽만이 답이고 저쪽은 아니고 그럴 수가 없는 거죠. 저는 제 작업을 통해 세상이 그렇게 납작하지 않다는 얘기를 하고 싶어요.”

―죽다 살아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인가요.

강이연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덤으로 주어진 인생을 살게 된 사람이 하는 말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