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아라비아가 9일(현지 시각) 레바논에 체류 중인 자국민들에게 "친(親)이란 무장 정치조직 '헤즈볼라'의 공격 표적이 될 우려가 있다"며 "최대한 빨리 레바논을 출국하라"는 긴급 경보를 발령했다. 사우디의 걸프 동맹국인 쿠웨이트·아랍에미리트(UAE) 등도 정세 악화를 이유로 자국민에게 레바논 철수령을 내렸다.

사우디 전격 방문한 佛대통령 - 9일(현지 시각) 사우디아라비아 수도 리야드를 전격 방문한 에마뉘엘 마크롱(왼쪽) 프랑스 대통령이 무함마드 빈 살만(오른쪽)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앙숙 관계인 사우디와 이란의 불화가 2015년 예멘에서 대리전(代理戰) 형태로 드러난 데 이어 레바논으로 옮아 붙고 있다. 전문가들은 레바논에서 무력 충돌 가능성까지 제기하고 있다.

이번 사태는 친(親)사우디 성향인 사아드 앗딘 라피크 알 하리리(47) 레바논 총리가 지난 4일 사우디에서 전격 사퇴를 선언하면서 시작됐다. 그는 "이란이 헤즈볼라를 앞세워 간섭하며 레바논 정치를 '납치'했다"며 "암살 위협도 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발표 전날 보좌관에게 알리지도 않고 사우디로 날아간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그는 연락을 끊고 잠적했다. 그의 선친인 라피크 바하 앗딘 알 하리리 전 총리는 이란·시리아의 레바논 정치 개입에 반대하다 지난 2005년 괴한이 터뜨린 폭탄에 의해 암살당했다.

이란은 하리리 사퇴를 사우디 탓으로 돌렸다. 자바드 자리프 이란 외무장관은 "그는 사우디가 시킨 짓을 했을 뿐"이라며 "지난달 말 재러드 쿠슈너 백악관 선임고문과 무함마드 빈살만 사우디 왕세자가 비밀리에 만나 이란 음해용으로 짠 계획의 일부"라고 했다.

로이터통신은 복수의 소식통을 인용해 "하리리 총리가 이란과 헤즈볼라의 영향력 확대를 막지 못하고 오히려 이들에 기우는 모습을 보이자 사우디가 그를 사퇴시켰다는 설이 있다"고 전했다. 레바논 정치판에서 사우디와 이란의 힘겨루기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사우디는 군사 조치에 나설 뜻도 시사했다. 아델 알 주베이르 사우디 외무장관은 지난 6일 "이란이 지원하는 예멘 반군 '후티'가 지난 3일 탄도미사일을 사우디 수도 리야드를 향해 쏘는 '전쟁 행위'를 저질렀다"며 "요격 미사일로 이를 막았지만, 사우디는 결코 가만히 있지 않고 적절한 시기에 대응 조치를 할 것"이라고 했다.

미국 국제 정세 싱크탱크 스트랫포는 "사우디는 최근 이스라엘과 안보 협력을 강화하면서 '공동의 적'인 이란에 맞설 방안을 긴밀히 논의하고 있다"며 "이스라엘도 레바논과 국경을 맞대고 있고 헤즈볼라의 무력 도발을 최대 위협으로 보고 있어 사우디의 레바논 군사 개입을 직·간접적으로 지원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AFP가 이스라엘 정부로부터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사우디 실세 왕세자 무함마드 빈살만은 지난 9월 극비리에 이스라엘을 방문해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를 만나 이란 문제를 논의했다.

사우디·이란 간 갈등이 고조되자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이날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급히 사우디를 방문해 중재에 나섰다. 그는 빈살만 왕세자를 만나 "레바논의 안정과 정치적 통합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사우디가 평화적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했다. 그는 또 예멘 내전 등 중동의 각종 분쟁의 해결 방안에 대해서도 논의했다고 AFP통신은 전했다.

사우디가 이란 견제에 총력전을 펼치는 건 이란이 주도하는 이른바 '초승달 동맹 연대'가 최근 들어 점점 강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슬람 시아파의 우두머리 격인 이란은 최근 예멘·카타르·이라크·시리아·레바논 등과 힘을 합쳐 중동의 전통적인 패권국이자 이슬람 수니파의 맹주인 사우디의 위상을 위협하고 있다.

이란은 극단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 사태에 휘말린 이라크에 대규모 시아파 민병대를 파병해 도와주면서 이라크 정부의 마음을 샀다. 양국은 최근 군사 동맹도 맺었다.

이란은 "왕정은 반(反)이슬람적"이라는 사상을 이슬람권에 확산시키며 사우디 왕실을 위협하고 있다.

사우디와 이란의 갈등은 뿌리가 깊다. 사우디와 이란은 7세기부터 원수가 된 이슬람 양대 종파 수니·시아파를 대표하는 국가이다. 정치뿐 아니라 종교 면에서도 적대심이 강해 작은 사건도 크게 번질 가능성이 크다.

시아파·수니파

이슬람교 창시자 무함마드의 사후(632년) 그의 후계자 선정 방법을 둘러싸고 분열한 양대 종파(宗派)다. 무함마드의 핏줄만이 후계자가 될 수 있다고 한 세력은 시아파가 됐다. 후계자를 공동체의 다수결 투표로 선출해야 한다는 측은 수니파가 됐다. 수니파는 세계 전체 이슬람 신자 16억명 중 90%를 차지한다. 시아파는 10%로 추산된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수니파, 이란은 시아파의 종주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