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7월 29일 새벽 장맛비가 쏟아졌다. 밀물이 안성천에 밀려들었다. 충남 천안 성환 소사평 벌판은 물구덩이로 변했다. 그 악다구니 속에서 일본군과 중국군이 전투를 벌였다. 일본군이 대승을 거뒀다. 이보다 나흘 전 바다에서도 전투가 있었다. 인천 앞바다 풍도 해전이다. 이 또한 일본군이 승리했다. 청일전쟁이다. 왜 북경도 아니고 동경도 아닌, 조선 땅 한적한 들판에서 전쟁을 벌인 것인가. ‘조선을 돕기 위해서’라고 했다. 조선 전역을 휩쓰는 반란을 진압하겠다고 했다. 오지랖이 넓은 게 아니라, 반란군을 토벌해 달라는 조선 정부의 공식 요청을 받고 출정했다고 했다. 엄연하게 공권력과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어야 할 조선 정부의 요청. 123년 전 이 땅에서 벌어진 황당한 전쟁, 청일전쟁 이야기다. 1893년 5월 조선 국무회의 청일전쟁이 터지기 1년 전인 1893년 5월 10일 정기 어전회의가 열렸다. 이미 전국이 동학(東學)으로 시끄럽던 때였다. 고종이 묻는다. “동학당의 소요가 놀랍고 통탄스럽다. 엄히 징계했더라면 오늘날처럼 창궐하는 폐단은 없지 않았겠는가.” 대신들이 “소요가 일어난 근본 원인은 탐관오리 때문”이라고 한목소리로 아뢰자 고종은 “반드시 먼저 탐오하는 자들을 징계해야 한다”고 교시했다. 그러며 한마디를 더 했다. “중국에서는 (반란 진압에) 영국 군사를 빌려 쓴 일이 있었다.” 놀란 대신들이 이리 답했다. “어찌 중국의 일을 본받아야 할 일이겠습니까.”(승정원일기) 1894년 만석보와 동학농민혁명

조병갑의 아버지, 조규순 선정비. 동학혁명의 불씨가 된 비석이다. 전북 정읍에 있다.

계절이 세 번 바뀌도록 탐관오리가 횡행하는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마침내 이듬해 2월 15일 전라도 고부에서 민란이 터졌다. 동학농민혁명이다. 고부 군수 조병갑이 만석보라는 쓸데없는 보(洑)를 지어 물세를 받아먹고, 제 아비 조규순의 선정비에 비각을 세우겠다며 비용을 징수한 것이다.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 무리는 만석보를 부수고 군수 조병갑을 몰아냈다. 조정에서는 농민 세력 설득을 위해 장흥부사 이용태를 안핵사로 보냈다. 군사들과 함께 고부에 온 이용태는 농민들을 동비(東匪), 동학 도적이라 불렀다. 민가 약탈과 강간이 횡행했다. 다시 민란이 벌어졌다. 조정에서는 홍계훈을 사령관으로 중앙군을 내려보냈다. 홍계훈은 1882년 임오군란 때 민비를 등에 업고 달아난 공으로 벼슬을 한 사람이다. 농민군은 장성 황룡촌에서 관군에 대승을 거뒀다. 그때 농민군은 분당 400발짜리 개틀링 기관포를 위시해 관군이 가지고 있던 무기를 대량으로 노획했다. 농민들은 전주로 향했다. 서울까지 올라가 조정에 세상을 알리고 개혁을 주장하려 함이었다. 전주는 전주 이씨 왕실의 성지였다. 5월 30일 전주에 농민군이 입성했다. 민영휘가 끌어들인 외국군 황룡전투에 앞서 황토현에서 농민에게 참패한 이래 홍계훈은 여러 차례 조정에 청나라 군대가 필요하다고 보고서를 보냈다. 관군만으로는 민란 진압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홍계훈이 비슷한 때에 보낸 또 다른 보고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비적들은 민영준을 축출해 정사에 간섭하지 못하게 한다면 모두 귀순할 것이요 그러지 않는다면 몸이 갈라지고 뼈가 부서지더라도 영원히 해산하지 않겠다고 한다."(주한일본공사관 기록, 일청양국군래방에 따른 국내외탐정보고 1894년 6월 12일) 하지만 전주를 장악했던 동학농민군은 6월 10일 일본과 청이 개입했다는 소식을 듣고 무장을 해제하고 농사에 복귀했다.

충남 공주 우금치에 있는 동학혁명군위령탑. 동학혁명이 결정적으로 좌절된 현장이다.

외국 군사를 요청하라는, 민영준을 축출하라는 두 보고서를 민영준이 읽었다. 민영준은 선혜청장이다. 선혜청은 세금을 관할하는 관청이다. 매천 황현은 "어린아이까지 더러운 놈이라 침을 뱉고 욕할 만큼 재물 긁어모으는 모든 일을 주관한 자"라고 했다. 민씨 정권에서 가장 부패한 자라고 손가락질받는 자였다. 그럼에도 "요즘 세태가 어떤가"라 묻는 고종에게 "아무 탈 없이 여전하다"고 대답해 힐책을 받던, 그런 자였다. 민영준은 훗날 민영휘로 개명했다. 병조판서를 겸하던 민영휘는 당장 서울에 와 있던 청나라 장수 원세개를 찾아가 원병을 청했다. 그리고 궁궐에 들어가 고종에게 "원세개가 허락했으니 청나라 군사를 부르시라"고 청했다. 고종은 "여러 대신들 논의 역시 구원을 요청하는 것이 마땅하니, 청관 조회의 발송을 재촉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갑오실기, 양력 6월 4일) 을사늑약 후인 1905년 11월 30일 민영환이 자결했다. 용인 장지(葬地)에서 민영휘를 만난 한 무관(武官)이 그에게 말했다. "네가 나라를 망쳐 오늘에 이르렀으니 두렵지 않은가? 가라, 아니면 내가 죽일 것이다." 민영휘는 힘없이 그 자리를 떠났다.(황현, '매천야록')

청나라군이 들어오면 청과 일본이 맺은 조약에 따라 일본도 자동으로 군사를 보내리라는 사실을 고종도 알고 있었다. 아무리 일찌감치 '금송아지를 고종에 준 민영휘'(매천야록)라고 해도 왕은 이에 동의해서는 아니 되었다. 결국 일본은 6월 9일 청군에 앞서 정예부대를 제물포로 먼저 상륙시켰다. 며칠 뒤 민영휘를 뜯어말렸던 영돈령부사 김병시가 고종에게 이리 고함을 질렀다. "한마디 훈계나 꾸지람도 없었으니, 어찌 이런 나라가 있습니까?" 고종이 이리 하교하였다. "참으로 그렇구려!"(갑오실기, 6월 23일) 영돈령부사는 실권 없는 왕실 척족 친목회장이다. 일본의 경복궁 점령 양국 군대가 조선에 들어오고 한 달 뒤인 7월 23일 일본 혼성여단이 경복궁을 무장 점령했다. 여단장은 오시마 요시마사(大島義昌) 소장, 아베 신조 현 일본 총리의 외고조부다. 조선군은 많은 병력이 동학 진압을 위해 내려가 있었다. 중앙군인 장위영은 이미 일본군에 장악됐다. 사대문에도 일본군이 배치돼 지원군 진입이 불가능했다. 오로지 평양에서 파견된 방위군 병력 500여 명만 궁성에 남아 있었다. 0시 30분 작전이 개시됐다.

충남 천안에 있는 국립축산과학원 속에는 아흔아홉 칸짜리 기와집 취원각이 있다. 일제강점기 이곳에서 큰 목장을 했던 일본인 아카보시 데쓰마가 지은 집이다. 무능력하게 나라를 내준 권력층 작태를 엿볼 수 있는 상징물이다. 청일전쟁 첫 육전이 벌어진 성환에 있다.

새벽 5시 지금 청와대로 들어가는 효자로 쪽 영추문을 일본 공병대가 부쉈다. 격렬한 교전이 벌어지고 오전 7시 30분 조선 병사가 북악 쪽으로 후퇴하며 사격이 멈췄다. 야마구치라는 대대장이 건청궁에 있던 고종에게 칼을 들이밀고 무장해제를 요구했다. 고종은 군사에게 무기를 내려놓으라고 명령했다. 그제야 전투가 끝났다.(일청전사 초안) 병사들은 통곡하며 총을 부수고 군복을 찢으며 도망했다.(매천야록) 이틀 뒤 풍도에서 일본 군함이 청 군함을 격침시키고 연이어 성환에서 일본군이 청군을 섬멸했다. 8월 1일 상황을 장악한 일본이 청에 선전포고했다. 경복궁을 점령한 일본군은 무기고에 있던 조선군 무기를 효창동에 있는 여단 사령부로 옮겼다. 무기 목록은 이렇다. 크루프 산포 8문, 개틀링 기관포 8문, 모젤, 레밍턴, 마르추 소총 2000정, 화승총과 활 다수, 군마 14필(경성부사). 전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명품 무기들이었다. 조선군끼리 총을 쏴댄 평양전투 퇴각한 청군을 쫓아 일본군은 평양으로 진군했다. 경복궁 점령 직후 일본은 친일 정권을 세우고 한·일 공수동맹을 맺었다. 이에 따라 평양으로 가는 일본군에 중앙군인 장위영이 수색대로 합류했다. 고종-민비 세력과 다투다 실각했던 흥선대원군은 그때 평양감사였던 민병석에게 청나라 군사와 연합하라고 밀지를 보냈다. 평양성 내 청군과 연합한 평양 지방군 위수병이, 외곽에서는 일본군과 연합한 장위영이 서로에게 총을 쏘았다.(신편 한국사) 9월 15일 벌어진 평양전투는 일본군 승리로 끝났다.

죽창을 내려놨던 농민들이 다시 무기를 들었다. 이번 목표는 외세 축출이었다. 조선 정부가 신설한 동학농민군 진압군 '양호도순무영'이 일본군과 함께 남쪽으로 진군했다.(갑오군정실기) 우금치와 석대들전투 영돈령부사 김병시의 고함은 헛되었다. 서울로 북진하던 농민군은 공주 우금치에서 일본군에게 참패했다. '머리끈을 묶고 남색 옷을 입은 열네댓 살 소년이 목말을 타고 깃발을 흔들면 농민들도 주문을 외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농민들은 소년을 신동(神童), 신의 아이라 불렀다. 주문을 외면 총알도 뚫지 못한다고 생각했다.'(매천야록)

전남 장흥 장흥서초등학교 교정. 가운데 있는 팽나무는 123년 전 아픈 역사를 기억한다.

관군과 일본군이 고개 양쪽에서 회선포(回旋砲)를 쏘는데, 한 방에 수백 명이 쓰러졌다. 순식간에 고개는 '시체의 산이요 피의 바다(屍山血海)'로 변했다.(관군 기록, '양호초토등록') 피바다를 만들어버린 그 회선포가 바로 경복궁에서 일본군이 노획한 개틀링 기관총이다. 전의를 상실한 농민군은 뿔뿔이 흩어져 남하했다. 조일연합군은 전남 장흥까지 농민들을 추격했다. 장흥에 대기하고 있던 장흥동학군이 이들과 함께 전투를 치렀다. 석대들 너른 들판에서 농민 2000여 명이 죽었다.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관 관장 이대흠은 "과녁에 대고 사격 연습하는 수준"이라고 했다. 생포된 자들 가운데 지휘부는 지금 장흥서초등학교가 서 있는 공터에서 산 채로 화형당했다. 처형은 조선군이 맡았다. 장대에 걸고 형을 집행했다고, 지금도 학교 터 이름이 장대터다. 남은 기억들 1915년 10월 일본 사업가 아카보시 데쓰마는 청일전쟁 첫 육전이 벌어진 성환에 150만평짜리 목장을 지었다. 목장 한가운데에 조선식 목재 기와집과 중국식 석재집과 일본식 다다미방을 절충해 집을 지었다. 아흔아홉 칸짜리 집 이름은 취원각(翠遠閣)이다. 광복 후 목장은 대한민국 축산시험장으로 변했다. 지금은 국립축산과학원으로 쓰인다. 축산과학원 그 자체,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취원각. 이들이 남아 있어 123년 전 이야기를 들려준다. 2016년 장흥서초등학교는 운동장 한편에 체육관을 지었다. 예정 부지에 늙은 팽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학교에서는 나무를 베는 대신 나무 반대쪽 건물을 헐고서 체육관을 지었다. 팽나무가 살아남았다. 장대터에서 나무가 보았던 역사가 살아남았다. 없었다면 좋았으되, 지운다고 지울 수 없는 그런 이야기.

[11월 12일(일) 오전 11시 50분, TV조선 '땅의 역사-원주 편']

11월 12일(일) 오전 11시 50분 TV조선은 ‘박종인의 땅의 역사-원주편’을 방송한다. 여성 차별이 극심하던 조선시대 남장을 하고서 팔도를 유람한 대담한 여자, ‘금원’을 만난다. 금원의 고향인 원주에 흔적을 남긴 여자들, 그리고 금원이 여행한 지역 역사를 살펴본다. 그리고 끝내 여자의 벽을 넘지 못한 금원의 마지막 행적까지 추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