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 리서치 회사 A이사는 부서 워크숍 회식 중 직원들 앞에서 여성인 B과장을 끌어안고 키스를 했다. 이 회사 직원에 따르면 60대인 A이사는 평소에도 신입사원이나 20~30대 여직원을 안고 볼이나 입술에 뽀뽀를 자주 했는데 특히 B과장에게 심했다고 한다. B과장은 얼마 뒤 퇴사했고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에 성희롱 진정을 넣었다. 이에 대해 회사 임직원들은 공식적으로 문제 제기를 하지 않았다. A이사가 B과장과 같은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이 회사의 한 직원은 인권위 참고인 조사에서 "A이사가 딸같이 예뻐하는 마음에 스킨십을 한 것을 성희롱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납득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동성(同性) 간 성희롱이 직장 내 새로운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상사나 동료가 "동성끼린데 어때" 하며 하는 말과 행동에 대해 불쾌감을 느끼고 퇴사하는 20~30대도 생겨나고 있다.

"성희롱 男→男 86%, 女→女 22%"

한국여성노동법률지원센터 박윤진 노무사는 "상담을 하다 보면 성희롱 가해자는 성희롱이 이성 간에만 이뤄진다고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남녀고용평등법상 성희롱은 '사업주, 상급자 또는 근로자가 직장 내 지위를 이용하거나 업무와 관련해 다른 근로자에게 성적 언동 등으로 성적 굴욕감 또는 혐오감을 느끼게 하거나 성적 언동과 요구에 따르지 않았다고 불이익을 주는 것'이다. 남녀 구분 없이 직장 상사나 동료 때문에 '성적 굴욕감'을 느꼈다면 남―남, 여―여 간에도 성희롱이 성립한다.

인권위에 접수된 성희롱 사건은 2012년 228건에서 2016년 202건으로 줄었지만, 동성 간 성희롱의 경우 같은 기간 15건에서 30건으로 두 배 늘었다. 동성 간 성희롱 관련 인권위 접수 건수는 2012년부터 지난 9월까지 총 140건으로, 남성 간 성희롱은 80건, 여성 간 성희롱은 60건이었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이 지난해 5월 근로자 3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 중 8.9%가 지난 6개월간 1회 이상 성희롱을 당했다고 밝혔다. 이 중 남성 성희롱 피해자의 86.4%는 가해자가 남성이었으며, 여성 피해자 중 22%는 가해자가 여성이라고 답했다. 조사를 진행한 한국직업능력개발원 서유정 부연구위원은 "직장 내 동성 간 성희롱이 늘고 있다기보다는 성희롱 예방교육을 통해 동성 간 성희롱을 새로 인식하게 된 측면이 크다"고 했다.

"동성 간 성희롱 참는 경우 많아"

한국학중앙연구원 유진희(가명·여)씨는 김모(여) 사업관리실장 성희롱을 참지 못해 신고했지만 오히려 추가 피해를 봤다. 더불어민주당 김병욱 의원실에 따르면 김 실장은 올 2월 자신의 사무실에서 유씨한테 "치마 입었네? 트였네?"라며 유씨 치마를 들쳤다. 다른 남자 직원을 언급하며 "○○○이 좋아하니 잘 구워 삶아봐"라고 말하기도 했다. 유씨는 지난 6월 김 실장에 대해 성희롱, 부당업무 지시 등 이유로 연구원에 내부 고발을 했다. 외부 전문가가 참여한 심의위원회는 김 실장 성희롱에 대해 중징계, 부당 지시에 대해 경징계 요구를 했지만 8월 열린 한국학중앙연구원 인사위원회는 김 실장에 대해 경징계인 1개월 감봉 처분을 내렸다. 인사위원회는 또 내부 고발을 한 유씨에 대해선 김 실장 부당업무 지시를 따랐다는 이유로 같은 경징계인 경고 처분을 했다. 유씨는 본지 통화에서 "내부 고발 후 임직원들이 '그런 걸로 문제 삼으면 일을 하겠다는 거냐 말겠다는 거냐'며 등을 돌리기도 했다"며 "그냥 참고 가만히 있을 걸 하는 생각을 했다"고 했다.

여성가족부 '2015년 성희롱 실태조사'에 따르면 성희롱 피해 경험이 있는 응답자 중 78.4%가 '참고 넘어갔다'고 답했다. 이유(복수응답 가능)는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아서'(48.7%), '문제를 제기해도 해결될 것 같지 않아서'(48.2%) '업무 및 인사고과 등 불이익을 받을까 봐 걱정되어서'(16.2%) '소문 평판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15.4%) 순이었다. 서유정 부연구위원은 "동성 간 성희롱 피해자의 경우 이성 간 성희롱 피해자보다 참고 넘어가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동성 간에는 성희롱을 해도 '함께 농담하고 장난했다'고 생각하는 직장인들이 많다"면서 "동성 간 성희롱 피해자들이 괜히 문제 제기해 봤자 더 피해만 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결혼한 女후배에게 "위안부 되니 좋아?"

모 건설업체 신입사원 김모(30·남)씨는 "출근길이 짜증 난다"고 했다. 남성 팀장인 이모(42)씨가 거의 매일 아침 인사라면서 카톡으로 음란 동영상과 사진, 사이트 주소를 보내오기 때문이다. 회식 후 함께 사우나를 다녀온 뒤부터 부쩍 심해졌다고 한다. 김씨는 "이 팀장은 음란물에 나오는 남자와 나를 비교하기도 한다"고 했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 조사 결과 성희롱 유형과 관련해 성별로 차이가 있었다. 남성의 경우 본인을 성적 대상으로 삼는 음담패설, 음란물을 보여주는 행위, 음란한 내용의 통화 및 문자, 부부관계 및 연인관계에 대한 성적 질문, 성적인 관계의 강요 및 회유 등이 많았다. 여성은 남성에 비해 성별 관련 업무 능력의 비하, 부적절한 신체 접촉, 여성성 비하, 외모에 대한 성적 비유 및 평가로 고통받고 있었다.

여성 간 성희롱의 경우 결혼·출산과 관련된 사례도 적지 않았다. 직장인 오모(34·여)씨는 결혼할 때 여성 임원에게서 "위안부 되니까 좋아?"라는 얘기를 들었다. 신랑·신부 나이 차가 많이 나는 걸 두고 한 말이었다. 오씨가 임신하자 이 임원은 "밤에 부부끼리 일 많이 하나 봐"라고 했다고 한다.

직장인뿐만 아니라 인턴 등 취업준비생에게도 동성 간 성희롱은 고민거리다. 전모(여·25)씨는 최근 한 공공기관에서 6개월 동안 인턴을 했다. 당시 미혼 여직원인 최모(36)씨는 전씨가 남자직원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외근을 나갈 때마다 "둘이 운전만 하고 가는 것 맞느냐"고 자주 물었다. 퇴근할 때는 "집에 가는 것 맞느냐"고 캐물었다. 전씨는 "수치심을 느꼈지만 인턴 평가를 좋게 받아야 하기 때문에 문제 제기를 할 수 없었다"고 했다. 최근 한 기업 면접을 본 김모(27·남)씨는 "압박 면접이라는 식으로 면접관이 '여자랑 최근에 언제 자봤냐' '힘 좋게 생겼는데 증명해봐라'고 얘기했다"면서 "기업 수준을 알 만해서 합격해도 입사하지 않을 생각"이라고 했다. 남녀고용평등법상 근로자에는 '사업주에게 고용된 자'뿐만 아니라 '취업할 의사를 가진 자'도 포함되지만, 취업준비생이 입사 과정 또는 인턴 과정에서 당한 성희롱을 문제 삼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가해자들 "트집 잡아 물 먹이려는 것"

동성 간 성희롱 가해자로 지목된 임직원들은 "성희롱 의도는 전혀 없었다"거나 "(피해자가) 다른 이유로 나를 곤경에 빠뜨리려 한다"고 항변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러나 성희롱은 가해자의 고의성·의도성과 상관없이 피해자가 수치심을 느끼면 성립한다. 동성 부하직원에게 키스해 인권위에 진정당한 리서치 회사 A이사는 인권위 조사에서 "업무 성과가 좋지 않아 꾸짖고 술자리에서 술을 끼얹은 일에 대해 부하 직원이 서운한 감정을 품은 것 같다"고 말했다. 동성 간 성희롱 문제를 세대 차이로 보는 시각도 있다. 한 대기업 임원은 "예전 상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부서 직원들과 빨리 친해지려고 남자들끼리 야한 농담을 한 적이 있다"며 그러나 "반응이 썰렁해서 이런 식의 농담은 요즘 안 통하는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직장인 진모(32)씨는 "직장 상사 중에는 동성 간 야한 농담을 하는 게 재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꽤 있다"며 "사이가 안 좋거나 업무 성과가 떨어지는 부하직원이 야한 농담의 주요 대상이 되곤 한다"고 했다.

동성 간 성희롱 사건이 처벌이나 징계로 이어지는 경우는 이성 간 성희롱에 비해 적다. 인권위에는 지난 2012년부터 지난 9월까지 총 1311건의 성희롱 사건이 접수됐는데, 이 중 수사 의뢰나 사측에 징계 권고, 합의 종결 등 '인용'된 경우는 161건(12.3%)으로 조사됐다. 같은 기간 동성 간 성희롱은 총 140건 접수됐고 인용된 경우는 15건(10.7%)이었다. 박윤진 노무사는 "지금까지 직장 성희롱 예방교육은 남자 상사가 여자 부하직원에게 하는 말과 행동에 초점을 맞춰왔는데, 동성 간 성희롱 등 다양한 상황을 자세히 소개하며 교육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