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서구의 한 일반고 3학년 최영상(가명)군은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영어회화 학원에 다녔다. 중학교에 진학해선 내신성적을 관리하느라 문법·독해 등 문제 풀이 위주의 학원으로 갈아탔다. 영어 과목 수강료만 월 40만원. 이번 수시모집에 응시하기 직전까지 쉬지 않고 다녔으니, 지난 5년간 영어 사교육비만 3000만원(국어·논술 등 포함 약 5000만원)에 달한다. 그러나 최군의 모의고사 성적은 3~4등급으로, 교육비와 공부 시간에 비하면 성적은 그리 높지 않은 편이다. 문제는 '시간'이었다. "시험 시간은 5분 남았는데, 문제가 10개 이상 남은 때도 있어요. 잘하는 친구들이 문제당 1분 걸린다면 저는 5분은 필요해요. 시험에선 깊이 생각하면 (문제를 다 못 푸니) 낮은 점수를 받게 되더라고요."

최군에게 영어시험은 '시간시험'과 같다.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의 경우, 영어 과목은 총 45문제를 푸는 데 70분을 준다. 풀이 시간이 문제당 2분도 안 되는 셈. 최군처럼 지문 전체를 읽으면서 풀기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다. 그래서 최군을 비롯한 많은 학생이 학교와 학원을 오가며 문제 유형을 익히고 정답을 찾아내는 능력을 기르는 데 막대한 시간과 비용을 쓰고 있다. 최군은 "오랫동안 영어학원에 다니면서도 정작 '영어를 왜, 어떻게 배워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며 "원어민과 영어로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싶다는 바람도 못 이룬 채 돈과 시간만 버렸다"고 씁쓸해했다.

최근 우리 사회에선 인공지능과 4차 산업혁명에 대비한 '창의·융합교육'이 급부상하고 있다. 20~30년 후엔 인공지능이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니, 창의·융합적 사고를 하지 않으면 취업은 물론 생계까지 위협을 받을 수 있다는 무시무시한 '경고성 전망'이 연일 쏟아져 나온다. 2015 개정 교육과정(이하 2015과정)이 추구하는 인재상도 다름 아닌 '창의·융합형 인재'다. 이런 흐름에 맞춰 과목 수를 줄이고 선택과목을 확대하거나 거꾸로 교실(flipped learning)과 같은 새로운 교육방법론이 속속 도입되고 있지만, 내신과 모의고사·수능 등 학생들이 치르는 시험은 1~2시간 안에 30~45개 문제의 정답을 고르는 '선다형 지필 시험'이 여전하다.

◇"창의·융합 역량, 선다형 지필고사로 평가 못 해"

수능은 선다형 지필 시험의 대표적인 유형이다. 이 시험은 ▲국어 45문제 80분 ▲수학 30문제 100분 ▲영어 45문제 70분 ▲한국사 20문제 30분 등 문제당 2~3분에 불과한 시간을 주고 정답을 고르게 해, 창의·융합적 능력을 재는 덴 한계가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수능을 설계해 '수능의 아버지'라 불리는 박도순 초대 한국교육과정평가원장조차 선다형 지필 시험에 회의적이다. 박 초대원장은 "기본적으로 시간 탓에 점수를 적게 받았다면 그건 시험이 잘못된 것"이라며 "시험에서 시간이라는 변수를 주는 건 단순히 변별력을 내기 위한 것일 뿐인데, 이런 시험의 결과인 점수를 곧 해당 분야의 능력이라고 착각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대학 입시의 영향으로 초중등 교육과정이 '점수의 공정성'을 요구받으면서 지능(IQ)검사와 같은 '속도검사'에 파묻혀 버린 게 현실"이라며 "창의·융합 등의 역량은 선다형 지필고사로 평가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각계 교육전문가의 의견도 박 초대원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시험은 학생의 학습 향상도와 지적 이해의 과정을 확인해 교육에 활용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여야 하는데, 현행 교육 과정의 시험은 오로지 '입시'를 위한 목적(점수)으로 전락했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교육 과정의 각종 시험은 입시 선발의 정량지표로 쓰여야 하기에 학교는 선다형 시험을 이어갈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학생 간 우열을 가려야 하니 선다형 문제의 난도를 조정하고 여기에 '(짧은)시간'이라는 변수까지 들어가게 되는 구조다. 이러다 보니 교실에서 아무리 창의·융합형 수업을 해도 학생들은 흥미로운 레크리에이션쯤으로 받아들이고, '진짜 공부'는 문제 풀이식 학원 공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평가 개선, 시험 시간도 고려해야"

하지만 수시모집이 확대되고 수능 절대평가와 수행평가가 속속 도입되면서 정해진 시간 안에 많은 문제를 푸는 선다형 지필 시험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분석이 힘을 받는다. 앞으론 '창의' '융합' '협력' 등 미래 교육과 관련한 역량을 평가해야 해서다. 특히 창의·융합과 관련한 교육을 평가하려면 시험의 범위와 유형, 문항 수에 관한 고민만큼 '시험 시간'도 진지하게 고려할 요소다. 민경찬 연세대 명예특임교수는 "과거 정부에서 수능을 이틀간 보더라도 문제 푸는 시간을 많이 줘야 한다는 의견이 논의되기도 했다"며 "그만큼 앞으로 교육은 하나의 문제를 파고들어 질문하고 토론하는 과정에서 깊이 있는 생각이 시작되고, 이런 생각 속에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온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융합교육만 보더라도 다양한 분야의 서로 다른 의견들이 모여 예상치 못한 새로운 것을 창출하는 것이라서 혼자선 융합을 할 수 없을뿐더러 이 역량을 평가하려고 개인별로 시험을 볼 수도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수능 개편안을 내년으로 미뤄둔 정부도 국정과제에 '초·중학교 평가제도 개선안'을 포함하고 최근 정책연구에 착수했다. 하지만 시험 시간(혹은 기간)에 관한 개선안은 기대하기 어려워 보인다. 교육부 관계자는 "시험 시간에 관한 기준이나 원칙은 기존에도,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문제 난이도와 유형에 따라 출제자가 판단할 부분이라서 표준화된 지침을 만들 수 없을 것"이라면서도 "내년부터 연구학교를 운영하면서 현장의 의견을 수렴해 초·중학교 평가 개선안을 확정 지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