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녀(父女)가 같은 희귀 난치병을 앓는 이모(35)씨와 딸(14)의 사연은 지난 2006년 12월 한 방송사의 다큐멘터리를 통해 처음 알려졌다. 이씨 부녀는 치아와 뼈를 연결하는 부위에 악성 종양이 계속 자라나는 '거대 백악종'으로 투병해 왔다. 이씨는 종양을 제거하는 수술을 여러 차례 받으면서 잇몸을 모두 긁어내 어금니 하나만 남았다. 그는 투병 와중에도 딸의 수술비를 모금하려 자전거 전국 일주, 길거리 모금 등을 하면서 '어금니 아빠' '천사 아빠'로 불렸다. 그랬던 이씨가 지난 5일 딸의 친구를 살해하고 시신을 유기한 혐의로 경찰에 체포됐다. 살해 이유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꿋꿋했던 한 가족의 비극

아홉 살 때 희귀병 진단을 받은 이씨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아르바이트 등으로 생계를 꾸렸다. 그는 일식집에서 일하던 2003년 최모(32)씨를 만나 인연을 맺었고, 그해 딸을 낳았다. 딸은 생후 6개월 됐을 무렵 아빠와 같은 병을 앓기 시작했다. 이씨는 딸의 치료비 모금 활동을 했다. 딸의 이름을 딴 개인 홈페이지도 운영하면서 투병일지를 올렸다. 2009년엔 미국을 찾아 자신의 사연을 알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씨는 사람들의 관심이 점차 줄어들면서 우울증에 시달려온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2009년 한 인터넷 카페에는 아내 최씨의 명의로 "남편이 간질과 치매 탓에 가족을 잊어가고 있다. 수많은 약을 먹으며 겨우 버티고 있다"는 글이 올라왔다. 이씨도 2010년 자신의 홈페이지에 "간질과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밝혔다.

최씨의 인생도 비극적으로 끝났다. 최씨는 지난달 1일 "2009년부터 8년간 의붓시아버지로부터 지속적으로 성폭행을 당했다"며 남편과 강원 영월경찰서에 찾아가 고소장을 냈다. 2009년은 이씨가 딸의 병원비 마련을 위해 미국으로 갔던 해다. 최씨는 남편이 미국에 가 있는 동안 강원도 영월의 시댁에서 머물렀는데, 이때부터 최씨 시어머니와 사실혼 관계에 있던 의붓시아버지의 성폭행이 시작됐다고 주장했다. 최씨는 고소장을 낸 지 나흘 만인 지난달 5일 서울 망우동 5층 자택에서 투신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당시 숨진 최씨의 이마 부분엔 무언가로 맞아 찢어진 듯한 상처가 나 있었다고 한다. 투신으로 인한 신체 손상과는 다른 것으로 조사됐다. 경찰은 당시 집에 같이 있었던 이씨가 목숨을 끊으려는 아내를 말리지 않은 혐의가 있다고 보고 내사해 왔다.

범행 후 수면제 과다복용

이씨는 딸의 친구인 김모(14)양을 살해하고, 시신을 강원도 영월 야산에 버린 혐의로 지난 5일 경찰에 체포됐다. 경찰이 확보한 이씨의 서울 망우동 집 앞 폐쇄회로(CC)TV에는 지난달 30일 이씨의 딸과 김양이 함께 들어가는 모습이 담겼다. 지난 1일 오후엔 이씨 부녀가 검은색 여행가방을 들고 집에서 나와 차량 트렁크에 싣는 장면이 찍혔다. 경찰은 이 가방에 김양의 시신이 담겼을 것으로 추정한다.

경찰은 5일 오전 10시 20분쯤 이씨 명의로 되어 있는 도봉구의 한 빌라에서 이씨를 체포했다. 경찰은 "검거 당시 이씨와 그의 딸은 수면제를 과다 복용해 쓰러져 있었다"고 했다. 이씨 부녀는 병원으로 옮겨졌다. 이씨는 깨어났다 잠들기를 반복하고 있고, 딸은 아직 의식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씨는 수면제 복용 전 차 안에서 딸과 함께 유서 형식의 영상을 남긴 것으로 조사됐다. 이 영상에서 이씨는 "내가 김양을 살해한 게 아니다. 자살하려고 보관해 온 약을 김양이 영양제인 줄 알고 먹은 것 같다. 김양이 숨지자 시신을 유기했다"는 취지의 주장을 했다.

알리바이 조작 정황도

이씨가 범행을 감추려 한 정황도 있다. 그는 김양의 시신을 옮길 때 차량용 블랙박스를 떼 놨다가 이후 서울로 돌아와 블랙박스를 다시 붙인 것으로 조사됐다. 김양의 시신을 강원도 야산에 유기한 뒤엔 곧바로 동해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아내를 그리워하는 듯한 취지의 글을 홈페이지에 올리기도 했다. '아내가 그립다. 동해에 가서 아내를 생각했다'라는 내용이었다. 5일 이씨가 검거되고 14시간 뒤에 그의 홈페이지엔 '아빠가 마지막으로 딸을 위해 쓰는 편지'라는 글이 올라왔다. 이씨의 형이 띄운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이씨의 홈페이지는 폐쇄된 상태다.

병원에서 경찰 조사를 받은 이씨는 시신 유기 혐의를 인정했다. 경찰은 이씨의 진술에 따라 지난 6일 오전 강원 영월의 한 야산에서 김양 시신을 발견했다. 하지만 이씨는 살인 혐의에 대해선 입을 다물고 있다. 김양의 가족은 "(김양과 이양이) 같은 초등학교 출신이었지만 별로 친하지는 않았다. 초등학교 졸업 후 오랜만에 만난 것 같다"고 했다.

☞거대 백악종

치아와 뼈를 연결하는 부위에 종양이 계속 자라나는 희귀 난치병이다. 전 세계에서 10여 명이 이 병을 앓고 있고, 우리나라에선 이모씨 부녀를 포함해 3명이 환자로 알려졌다. 완치할 수 있는 치료법은 아직 개발되지 않았다. 환자가 수술을 통해 주기적으로 입속의 종양을 제거하지 않으면 기도 등이 막혀 사망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