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남동쪽으로 25km 떨어진 산지에 축성된 남한산성은 조선 시대(1392년~1910년)에 유사시를 대비하여 임시 수도로서 역할을 담당하도록 건설된 산성이다. 남한산성의 초기 유적에는 7세기의 것들도 있지만 이후 수차례 축성되었으며 그중에서도 특히 17세기 초, 중국 만주족이 건설한 청(淸)나라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여러 차례 개축되었다.

사진= 남한산성 북문

주봉인 해발 497.9m의 청량산을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연주봉(467.6m), 동쪽으로는 망월봉(502m)과 벌봉(515m), 남쪽으로도 여러 봉우리를 연결하여 쌓인 성벽이다. 성벽의 바깥쪽은 경사가 급한 데 비해 안쪽은 경사가 완만하여, 방어에 유리하면서도 적의 접근은 어려운 편이었다.

[한양의 남쪽 지킴이, 남한산성]

남한산성(南漢山城, 해동지도)

조선 시대 한양을 지키는 남쪽 산성이었던 남한산성은 신라 주장성(晝長城)의 옛터를 활용해 1624년에 축성했다.(남한산성은 백제 온조왕의 성터였다는 견해도 있다.) 조선 시대에 후금의 위협을 받고 이괄의 난을 겪은 뒤 인조 2년(1624)에 지금처럼 다시 고쳐 쌓았다.

'남한지(南漢志)'에 따르면, 원래 심기원이 축성을 맡았으나 그의 부친상으로 인해 이서가 총융사(摠戎使)가 되어 공사를 시작하여 1626년 7월에 끝마쳤다. 공사의 부역은 주로 승려가 맡아 했다. 그 뒤 순조 때까지 여러 시설이 정비되어, 우리나라 산성 가운데 가장 시설이 잘 완비된 산성으로 손꼽힌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는 금을 배척하고 명과 친하게 지내는 '배금친명' 정책을 취했다. 또 후금이 차지하고 있던 요동 지방을 되찾기 위해 평안북도에 주둔한 명나라 군대를 몰래 지원하기도 했다. 명나라와 경쟁 관계에 있던 후금은 이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런데 때마침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남은 무리들이 후금을 찾아가 '지금이야말로 조선을 칠 때다.'라며 조선을 칠 것을 부추겼다. 후금은 이러한 것들을 구실 삼아 형제 관계를 요구하며 전쟁을 일으켰다. 이것이 1627년에 일어난 '정묘호란'이다. 3만 군사를 앞세운 후금은 압록강을 건너 황해도까지 침입했고, 인조는 할 수 없이 후금과 형제 관계를 맺었다.

병자호란

1636년, 후금은 청나라로 이름을 바꾼 후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중국의 주인이 되겠다는 야욕을 가지고 있던 청나라의 태종이 조선에 군신 관계를 요구하며 군사를 이끌고 침공했다. 태종은 12만의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공격했는데 이것이 '병자호란'이다.

인조는 먼저 왕세자와 왕실 가족을 강화도로 피신시키고 후에 강화도로 가려 했지만 이미 한양 가까이 밀고 들어온 청군에 길이 막혀 갈 수 없었다. 인조는 한양을 지키는 요새 중 하나였던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 남한산성에는 50여 일분의 식량과 1만 3천여 명의 군사밖에 없었다. 그런데 강화도가 함락되어 왕실 가족이 모두 인질로 잡혔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인조는 남한산성을 나와 청나라에 항복하기로 결정한다.

인조는 한겨울에 먼 길을 걸어 삼전도(지금의 송파)에 있는 청 태종에게 갔다. 그곳에서 인조는 항복의 표시로 '3배 9고두'를 해야 했다. 이것을 하다가 인조의 이마에서는 피가 흘렀다. 그렇게 조선은 청의 신하가 되었고, 항복의 대가로 엄청난 배상금과 함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척화파* 신하들과 20만 명의 백성을 청에 인질로 보냈다.

[무능한 정권이 자초한 전쟁… 백성들의 붉은 피]

현재, 남한산성 일대는 트래킹 코스로 인기가 높다. 남한산성도립공원은 성남시·하남시·광주시에 걸쳐 있으며, 동서남북 사방에 들머리가 있고 중간중간 거미줄처럼 얽힌 길을 조합하면 다양한 코스로 걸을 수 있다. 성남시 쪽 산기슭까지 지하철이 다니고 산성 안까지 노선버스가 운행해 당일 등산코스로 다니는 등산객들이 많다.

["이리 돌고 저리 돌아도 역사는 흐른다"]

["동서남북 어디로 올라도 고즈넉한 산길 좋아!"]

2014년 6월, 카타르 도하에서 제38차 세계유산위원회가 열렸다. 총 40건의 세계유적 심사대상 가운데 세계유산심의위원들은 12번째로 남한산성에 대한 심의를 벌여 만장일치로 세계문화유산 등재 결정을 내렸다. 심의위원들은 남한산성이 17세기 초 비상시 임시수도로서의 기능을 하고, 서양식 무기에 대응한 다양한 군사 방어기술을 집대성한 점을 높이 평가했다.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제38차 세계유산위원회

또 7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는 축성술의 시대별 발달단계와 무기체계의 변화상을 잘 보여 주며, 지금까지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는 살아 있는 유산으로서의 가치도 높다고 호평했다. 이와 함께 세계유산위원회는 남한산성 인접 지역의 개발행위를 적절히 통제하고 주민들이 유산관리에 효과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을 권고했다.

[남한산성,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등재]

삼전도비(왼쪽)와 삼전도비 동판에 묘사된 삼전도의 치욕(오른쪽)

조선 시대에 서울과 남한산성을 이어 주던 나루. 병자호란 때 인조는 남한산성에 피신했다가 47일 만에 청나라에 항복했다. 인조는 세자와 신하 500여 명을 이끌고 삼전도에 나와 청나라에 굴욕적인 항복을 했다. 청 태종은 인조의 항복을 받고 자신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조선에 삼전도비를 세우게 했다. 굴욕적인 비문을 쓰고자 하는 신하가 없었는데, 인조의 간곡한 부탁에 이경석이 글을 짓고 오준이 글씨를 썼다. 오준은 치욕을 참지 못해 자신의 오른손을 돌로 짓이겨 못 쓰게 만들고 다시는 글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삼학사전 - 1671년(현종 12) 송시열이 지은 삼학사의 전기

조선 시대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 화의를 반대하고 결사 항전을 주장하다가 인조가 항복한 뒤 중국 선양으로 끌려가 참형 당한 홍익한·윤집·오달제 등 세 명의 학사(學士)를 가리킨다.

청나라가 남한산성을 포위했을 때, 조정 신하들 사이의 의견이 일치하지 못했다. 최명길을 중심으로 한 주화파는 청나라와 화친을 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김상헌을 중심으로 한 주전파는 결사 항전을 주장하였으나 결국 주화파의 주장이 우세를 점했다. 이에 1637년 인조가 남한산성 밖으로 나와 청나라에 항복했고, 홍익한 등 세 사람은 척화(斥和)의 주모자로 중국 선양(瀋陽)으로 끌려갔다. 이들은 선양에서 모진 고문과 회유에도 척화의 뜻을 굽히지 않다가, 결국 참형 당했다. 조정에서 이들의 충절을 기려 홍익한에게는 충정(忠正), 윤집에게는 충정(忠貞), 오달제에게는 충렬(忠烈)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모두 영의정을 추증*하였다.

유네스코(위쪽)와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석굴암(왼쪽), 해인사 장경판전(오른쪽)

'세계유산'이란 세계유산협약에 따라 유네스코(UNESCO·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가 1972년부터 인류 전체를 위해 보호해야 할 현저한 보편적 가치가 있다고 인정한 유산으로, 문화유산·자연유산·복합유산으로 나뉜다.(이 가운데 특별히 '위험에 처한 세계유산'은 별도로 지정된다.)

문화유산은 유적·건축물·장소로 구성되는데, 대체로 세계문명의 발자취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유적지·사찰·궁전·주거지 등과 종교 발생지 등이 포함된다. 세계유산으로 지정되면 세계유산기금(World Heritage Fund)으로부터 기술적·재정적 원조를 받을 수 있다.

한국은 석굴암·불국사(1995), 해인사 장경판전(1995), 종묘(1995), 창덕궁(1997), 수원화성(1997), 고창·화순·강화 고인돌 유적(2000), 경주 역사유적지구(2000), 조선왕릉(2009), 한국의 역사마을:하회와 양동(2010), 남한산성(2014), 백제역사유적지구(2015) 등 11건이 문화유산으로,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2007) 1건이 자연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경북 김천의 비구니 사찰 청암사(주지 상덕 스님)는 남한산성 축성(築城)과 수성(守城)에 얽힌 스님들의 노고를 그린 '남한산성의 소리'를 지난 2015년 완성했다.

외부 전문가의 도움 없이 애니메이션 ‘남한산성의 소리’를 만든 김천 청암사 비구니 스님들

"남한산성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습니다. 그런데 남한산성을 스님들이 지었고, 병자호란과 그 이후에도 270년 동안 스님들이 지켰다는 것을 모르는 분들이 너무나 많더군요. 불자(佛子)들도 마찬가지고요. 그래서 쉽게 내용을 전달할 수 있는 애니메이션을 떠올린 거죠.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이렇게 힘든 줄 알았으면 시작도 못 했을 거예요."(상덕 스님)

인조 2년(1624)에 시작돼 3년간 계속된 남한산성 축성에 조선 조정은 전국의 스님들을 동원했다. 품삯과 식량을 주지 않아도 되는 공짜 노동력이었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스님들은 승군으로 동원됐고, 270년간 남한산성 수비에 동원됐다. 주인공 '국행 스님'의 일생에 남한산성의 역사를 오버랩시키는 스토리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남한산성, 스님들이 지었다는 것 아세요?"]

남한산성이 겪은 역사는 영화에서도 볼 수 있다. 2011에 개봉한 영화 '최종병기 활'에서도 병자호란 속 남한산성이 등장하고, 이번 10월 개봉 영화는 제목부터 '남한산성'이다. 영화 '남한산성'은 병자호란 때, 고립무원의 남한산성 속 조선의 운명이 걸린 치열한 47일간의 이야기를 그렸다.

[청년엔 의병, 노년엔 장군으로… 양난의 영웅 최진립]

[조선인이 되어 평생 나라를 지키다, 김충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