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 세계에 입문한 것은 초등학교 시절이다.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서서 연필 네 자루를 깎는 것은 작업 개시를 알리는 신호였다. 한밤중 연필의 흑연 심과 노트의 표면이 마찰하며 내는 사각거리는 소리는 마치 사랑을 속삭이는 듯했다. 연필은 영감, 아이디어, 꿈을 적을 수 있는 작가의 도구다. 펜이나 타자기와는 달리 연필로 쓴 것은 지울 수가 있다. 인간의 실수를 덮어주고 용인하는 관용이 두터운 도구인 것이다.
연필의 탄생 시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영국의 컴벌랜드에서 흑연 광맥이 발견되면서 흑연봉을 나무 몸통에 넣고 썼던 16세기 초반을 연필 역사의 기점으로 잡는다. 질 좋은 흑연 광산이 있는 까닭에 영국은 연필 제조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숲의 성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연필의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이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1840년대 소로는 매사추세츠주에 있던 아버지의 연필 회사에서 일했는데, 새로운 연필 제조 방식을 창안해냈다. 그 회사는 날로 번창했다.
지금도 많은 작가가 연필로 초고를 쓴다. 작가 토니 모리슨은 '파리 리뷰' 인터뷰에서 "나는 처음에는 무조건 연필로 써요"라고 말했다. 1962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미국 소설가 존 스타인벡은 유명한 연필 애호가였다. 그는 날마다 여섯 시간씩은 연필을 쥐고 소설 초고를 썼다. 자신이 연필을 손에 쥘 수 있는 '조건화된 손을 가진 조건화된 동물'이라는 사실에 자긍심을 품었다. 스타인벡은 마음에 드는 연필 수십 자루를 한꺼번에 사서 썼다. 그는 여러 회사 제품을 써봤지만, 가장 좋아한 것은 에버하드 파버가 1934년에 내놓은 '블랙윙 602' 제품이었다. 그는 새 연필로 글을 써본 뒤 "지금껏 써본 것 중에 최고야. 이름은 블랙윙인데, 정말 종이 위에서 활강하며 미끄러진다니까"라고 찬탄했다.
'손힘은 절반, 속도는 두 배'로 널리 알려진 블랙윙 602가 연필 역사에서 거둔 성과는 놀라웠다. 퀸시 존스나 레너드 번스타인 같은 유명 인사들이 이 연필을 썼다. 거장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소설에도 등장했다. 에버하드 파버에서 만든 원조 블랙윙 602는 1998년 생산이 중단되며 불멸의 지위를 얻었다. 보스턴글로브와 뉴요커 등이 블랙윙을 예찬하는 기사를 실을 정도였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