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여인, 턱을 괴고 앉아 하염없이 바라보는 사내는 트로이의 영웅이자 최고의 궁사 테우케르(Teucer)다. 팽팽한 복근, 쭉 뻗은 왼팔, 이제 막 화살을 날려 보낸 사내의 표정은 무심해서 사랑스럽다. 남자의 몸이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을까. 불혹(不惑)을 넘겼을 여인의 눈은 영웅의 늠름한 나신(裸身)에서 도무지 떠날 줄 몰랐다.
지난달 23일 뉴질랜드 오클랜드 미술관. 비바람 몰아치는 날씨에도 미술관은 관람객들로 붐볐다. 18세기 후반부터 현대까지 인간의 몸을 다룬 누드 예술 중 120점을 엄선한 '테이트 명작―The Body Laid Bare' 전(展). 올 초 런던을 떠나 세계 여행을 시작한 걸작들은 호주 시드니를 거쳐 두 번째 순회지인 오클랜드에서 관람객을 만나는 중이었다.
◇로댕, 피카소, 마티스… 巨匠이 빚은 '몸'
르네상스 양식의 순백색 미술관 2층에서 관람객을 맞은 건 아담과 이브였다. 윌리엄 스트랭의 '유혹(The Temptation)'. 뱀의 유혹에 넘어간 이브가 아담에게 사과를 건네는 장면은 파국을 예상하지 못한 양 평화롭기만 하다. 유혹하는 여인은 또 있다. 큐피드가 도착하기 전 몸을 씻기 위해 이제 막 옷을 벗는 프시케. 나르시시즘으로 가득 찬 여인을 고혹적으로 묘사한 '프시케의 목욕'은 고전주의 부활을 이끈 프레더릭 레이턴의 역작이다. '이카루스를 위한 애도'도 웅장하고 감미롭지만, 젊은 여성들은 애너 리 메리트가 그린 '닫힌 사랑' 앞에서 탄성을 자아낸다. 죽은 소녀가 그리워 굳게 잠긴 묘지의 문을 두드리며 울고 있는 소년. 여성 화가가 그린 남성 누드로 19세기 화단에 파란을 일으켰다.
두 번째 전시실은 가히 별들의 전쟁이다. 피카소, 마티스, 르누아르 등 근대미술의 거장들 손에서 탄생한 '몸'들이 사방에 걸려 어디에 먼저 눈을 두어야 할지 모를 정도다. 가슴과 음부를 아무렇지도 않게 드러낸 채 관람객을 쳐다보는 마티스의 '옷을 걸친 누드'. 막대처럼 뻣뻣한 피에르 보나르의 누드는 그 대척점에 있다. 에로틱해야 할 욕실이 푸른 빛 음산한 무덤처럼 보이는 건 평생 결핵을 앓다 죽은 아내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다. 그웬 존의 '누드 걸'도 지나치기 힘들다. 깡마른 몸, 목에 걸린 펜던트, 그 아래 분홍색 유두를 어쩔 수 없이 흘끔거려야 하는 관람객. 그림 속 여자가 신경질적으로 묻는다. "뭘 봐?"
◇아름답고도 불온한, 따뜻하고도 위험한
전시의 백미는 어둠 속에서 홀연히 솟구쳤다. 오귀스트 로댕의 '키스'. 석고, 청동으로 빚은 소품이 아니다. '신(神)의 손' 로댕이 순백의 대리석으로 빚은 단 석 점의 키스 중 하나로 무게가 3.3t에 달하는 대작이다. 제작 후 처음 유럽을 벗어나 세계여행을 시작한 걸작 앞에 관람객은 쉽게 발길을 떼지 못했다.
이제 누드는 낭만을 벗고 치열한 현실로 옮아간다. 세계적 여성 조각가 루이즈 부르주아의 '자연의 법칙'은 짓궂다 못해 폭소가 터진다. 사랑을 나누는 남녀의 관계를 코믹하게 전복시켰다. 여자가 남자를 번쩍번쩍 들어 올린다. 희대의 악동 데이비드 호크니와 세라 루커스는 더욱 불온하고 파격적이다. 동성애, 성폭력, 인종차별을 가차 없이 풍자하고 조롱한다. 표현주의 거장 윌럼 드 쿠닝의 '방문(The Visit)' 앞에 앉아 스케치를 하던 60대 남성 이안씨는 전직 미술 교사였다. "매일 오전에 와서 거장들 그림을 따라 그려요. 그들이 왜 위대한지 매번 감탄하고 절망하지요."
미술관 홍보담당 올리비아는 전시에서 가장 사랑받은 작품은 피카소도, 자코메티도 아닌, 네덜란드 작가 리네케 딕스트라의 사진이라고 했다. "출산 1시간, 출산 하루, 출산 1주일을 보낸 엄마와 아기의 사진이죠. 새 생명을 품은 여인의 몸만큼 숭고한 건 없으니까요."
예술이냐 외설이냐 뜨거운 논란에 휩싸이면서도 미술사의 혁신을 이끌었던 누드는 당대 미술가들이 자신의 이상과 정서, 사상을 표현한 미술 형식의 결정체였다. 거장 66인이 빚은, 매혹적이고도 불온하며 따뜻하고도 위험한 '세기의 걸작'들이 서울로 온다. 오는 8월 11일 서울 송파구 소마미술관에서 개막하는 '영국국립미술관 테이트명작전―누드'에서 그들을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