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행정원 원자능위원회(원자력위원회)는 지난 6월 가동 중단 상태인 원전 2기의 재가동을 잇따라 승인했다. 타이베이(臺北) 인근 신베이(新北)시 궈성(國聖)원전 1호기가 9일에, 남부 핑둥(屛東)현 마안산(馬鞍山)원전 2호기가 12일 각각 재가동에 들어갔다.

폭염이 지속되면서 전력예비율이 주의(6%) 단계를 넘어 3.52%까지 떨어지자 블랙아웃(대정전)을 우려한 대만 정부가 놀고 있던 원전을 긴급 '소방수'로 투입한 것이다. 앞서 대만전력공사는 "(대만이 보유한) 원전 6기 중 1기만 가동하면 급격히 늘어나는 여름철 전력 수요를 감당할 수 없다"며 원전 재가동을 요청했다.

원전 재가동을 결정한 차이잉원(蔡英文) 총통은 지난해 대선에서 "대만을 2025년까지 원전 없는 나라로 만들겠다"는 것을 핵심 공약으로 내세워 당선됐다. 그는 선거 기간에 "나는 사람이다. 나는 핵에 반대한다(我是人, 我反核)"라는 구호로 원전 반대 진영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집권당이 된 민진당은 지난 1월 전기사업법에 '오는 2025년까지 가동 중인 모든 원전을 완전 중단시킨다'는 조항을 추가해 탈(脫)원전을 되돌릴 수 없도록 못박았다. 민진당은 "원전을 중단해도 전력 위기도 요금 인상도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하지만 차이 총통 취임 이후 '현실'은 선거 '공약'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차이잉원(오른쪽 사진) 대만 총통은 지난해 대선에서 2025년까지 대만의 모든 원전 가동을 중단하는 ‘2025 비핵가원(非核家園)’ 공약을 내세워 당선됐지만, 지난달 원전 2기 재가동을 결정했다. 급증하는 여름철 전력 수요를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왼쪽 사진은 2013년 대만 타이베이에서 벌어진 반핵(탈원전) 시위.

차이 총통이 원전을 잇따라 재가동시키자 후폭풍이 불어닥쳤다. 야당인 국민당은 "차이 총통이 실현할 수도 없는 거짓말로 국민을 속였다"고 비판했다. 원전 재가동을 결정한 행정원장(국무총리)과 원자능위원장의 동반 사퇴를 요구하는 여론까지 일었다. 행정원은 "국민의 비핵화(탈원전) 기대를 이해하지만 위기를 막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며 "비핵화 목표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했다. 이어 "반도체 등 전자소재·부품 업종 비율이 높은 산업 구조상 정전이 발생할 경우 피해가 걷잡을 수 없게 된다"고도 했다.

차이잉원(蔡英文) 대만 총통의 '2025년 탈원전' 공약을 두고 "현실과 동떨어진 정책"이라는 지적이 지속적으로 제기돼왔다. 원전 재가동 결정 이후에는 중국시보 등 현지 언론들은 "차이 정권이 비핵화(탈원전)를 실현할 아무런 준비가 안 됐다는 게 드러났다"며 "비핵화는 한낱 구호였을 뿐"이라고 했다.

◇전력 예비율 갈수록 하락

[대만, 탈원전 큰소리 치다가 5개월만에 백기]

석탄·석유 같은 부존자원이 거의 없는 대만은 전체 에너지원의 97.5%를 수입에 의존한다. 반면 중국의 압박으로 외교 고립이 심화돼 에너지 수급은 불안하다. 겨울철을 빼면 연중 에어컨을 틀어야 하는 더운 날씨, 양질의 전력 수요가 절대적인 산업구조도 부담이다. 전력 예비율이 6% 아래로 떨어지는 '주의' 단계가 발령된 것도 2013년 1일에서 2014년 9일, 2015년 33일, 2016년 68일로 급증하고 있다.

집권당인 민진당은 "2025년까지 태양광·풍력 같은 신재생에너지를 20%까지 끌어올려 원전의 공백을 메울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산업계는 "좁은 땅 어디에서 태양광이나 풍력 발전을 하겠느냐"며 "날씨에 따라 전력 생산량이 들쭉날쭉한 신재생에너지로는 대만의 산업을 뒷받침하기 힘들다"고 우려하고 있다.

◇공정률 97.8% 원전 공사 중단

대만의 탈원전 정책은 지진이 잦은 자연환경이 국민의 불안감을 증폭시킨 게 큰 역할을 했다. '불의 고리'로 불리는 환태평양지진대에 있는 대만은 1700년대 이래 리히터 규모 7.0 이상의 대지진이 26회, 6.0 이상의 지진이 68회 발생했다. 1999년에는 대만 중부 난터우(南投)에서 대지진이 일어나 2415명이 숨졌다.

세계 2위의 인구밀도 탓에 원전 주변에 인구도 많이 몰려 있다. 대만 제1원전(진산), 제2원전(궈성원전)은 수도 타이베이에서 직선거리로 각각 28㎞, 22㎞에 불과하다. 두 원전의 반경 30㎞ 안에 각각 550만명, 470만명이 살고 있다.

대만의 정치권은 이 문제를 놓고 수십년간 논쟁을 벌였다. 친(親)중국·기업 성향의 국민당과 반중(反中)·친농(親農) 성향의 민진당은 사사건건 대립하며 파열음을 냈다. 그런 대립의 희생양이 2838억대만달러(약 10조원)를 쏟아붓고 공정률 97.8%에서 중단된 대만의 제4원전 룽먼(龍門)원전이다. 타이베이에서 동쪽으로 56㎞, 차로 1시간 거리 해안가에 있는 룽먼원전은 1999년 착공 당시 2006년과 2007년 1, 2기를 차례로 완공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현지 주민들과 연대한 민진당·시민사회단체의 반대로 공사 중단과 재개를 반복하며 15년을 끌었다. 2014년 당시 마잉주(馬英九) 총통이 반핵(탈원전) 시위에 굴복해 한시적으로 공사 중단을 선언했다. 2016년 대선에서 비핵 국가를 공약으로 내건 차이 총통이 집권하면서 결국 가동 한번 못해보고 폐물이 될 가능성이 커졌다. 대만 연합보는 "전력 부족으로 낡은 원전을 재가동하는 마당에 새로 짓는 원전을 폐기하려는 모순투성이 정책을 펴고 있다"며 차이 총통을 비판했다. 이어 "세상에 공짜 유토피아는 없다"며 "원전 제로(0)가 되면 대단위 사업장의 부담은 평균 758만대만달러(21억원) 늘어날 것"이라고 했다.

◇국민 52% "탈원전으로 전기요금 인상 받아들일 수 없다"

2011년 3월 후쿠시마원전 사고 이후 반핵 여론이 높아지면서 타이베이 시내에는 '반핵(反核)' '후쿠시마가 되풀이되는 걸 원치 않는다'는 글귀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하지만 전기요금 인상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은 크다. 지난달 22일 국민당 싱크탱크와 국가정책연구재단이 성인 남녀 107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52.6%가 "현 정부의 탈원전 정책으로 더 높은 전기요금을 내기를 원치 않는다"고 답했다. 원전 재가동으로 2025년 비핵화에 대한 회의론이 거세지면서 일부 여론조사에선 차이 총통의 지지도가 취임 후 최저치인 21%로 떨어졌다.

눈에 띄는 것은 대만의 비핵 진영의 논리와 행보가 한국 민주당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행보와 닮았다는 점이다. 문재인 정부의 '2030년 신재생에너지 20%'는 대만 차이잉원 정부의 '2025년 신재생에너지 20%'와 판박이다. 문재인 정부가 최근 공사 일시 중단 결정을 내린 울산 울주군의 신고리 5·6호기는 대만의 룽먼원전을 떠올리게 한다. 한국원자력안전재단은 "한국의 탈핵 진영은 2000년대 초부터 대만과 연계해 경험 공유, 주민투표 추진, 탈핵 교육, 안전 문제의 정치 이슈화 등 유사 전략을 추진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