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자 유발 하라리와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조선일보 독자를 위해 글을 보내왔습니다.

금요일자로 옮기고 지면을 혁신한 Books의 특별 기획, ‘이번 여름휴가에 가져갈 단 한 권의 책’ 추천입니다.

박상훈 기자

여섯 번째 대멸종

엘리자베스 콜버트 지음|이혜리 옮김|처음북스
|344쪽|1만7000원

지금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지구에 사는 생물체 대다수가 멸종했다. 가장 최근인 다섯 번째 대멸종은 6500만년 전에 벌어졌다. 우주에서 날아온 소행성이 지구에 떨어지면서 공룡을 비롯, 전체 생물종의 약 75%가 사라졌다. 이제 여섯 번째 멸종이 현재진행형이다. 이번에는 차이가 있다. 소행성 같은 외부 요인 때문이 아니다. 여섯 번째 멸종의 원인은 우리, 인류다. 인류는 지구 생태계를 좌지우지하는 가장 중요한 변화 요인이 됐다. 생태계의 가장 기초적인 규칙마저 새로 써나가고 있을 정도로.

6500만년 전 지구에 추락한 소행성은 진화의 방향을 바꿔놨다. 그러나 진화의 근본적인 규칙은 변함없었다. 40억년 전 지구에 생명이 출현한 이래 바이러스건 공룡이건 크고 작음에 관계없이 진화는 변치 않는 원칙, '자연 선택(natural selection)'에 의해 이뤄졌다. 하지만 (여섯 번째 대멸종을 진행하고 있는) 인류는 자연 선택을 지적 설계(intelligent design)로 대체하려고 한다. 유전 공학과 나노 기술, 인공지능의 도움에 힘입어 진화마저 좌지우지하겠다는 것이다. 그 와중에 지구 생태계의 수많은 종이 사라지고 있다.

2017년 기준으로 지구에 사는 대형동물 중 고작 10%만이 야생에서 살고 있다. 나머지 90%는 인간이거나 인간이 기르는 가축이다. 야생늑대는 전 지구를 통틀어 20만 마리에 불과하다. 가축화된 개는? 500만 마리다. 사자는 이제 4만 마리만 야생에 남았다. 집고양이는 600만 마리에 달한다. 아프리카 버펄로는 90만 마리인데 가축으로 키우는 소는 15억 마리에 달한다. 펭귄 5000만 마리 대 닭 200억 마리. 야생 동식물이 서식할 공간이 무서운 속도로 사라지고 있다는 뜻이다.

저자 엘리자베스 콜버트(Kolbert)는 엄밀한 과학적 지식과 예술적이라 부를 정도의 명석함, 그리고 사라져가는 종(種)에 대한 연민을 결합해 지구 생태계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묘사한다. '대멸종'을 다루는 책이지만 한 편의 스릴러처럼 한번 집어들면 도중에 내려놓을 수 없는 그런 책이다. 파나마 황금 개구리 시체, 폐사한 호주의 산호초, 수마트라에서 죽은 코뿔소…. 세계 곳곳에 널브러져 있는 시체를 훑어나가며 범인을 추적하는 기분이랄까. 이 책은 여러 단서를 면밀히 검토하면서 연쇄 살인을 저지른 범인의 몽타주를 완성해나간다. '호모 사피엔스'. 그가 범인이다. 콜버트는 특히 왜 과학자들이 이 변화의 책임을 인류에게 돌리는지를 끔찍할 정도의 노력을 기울여 설명한다.

불행히도. 일반적인 대중도, 그리고 도널드 트럼프 같은 정치인도 인류에게 책임이 있다고 믿기를 거부한다. 그러나 우리가 지구적 재앙을 피하고자 한다면 어서 행동해야 한다. 여섯 번째 멸종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전 지구적 협력을 통해서다. 어떤 국가도 홀로 기후변화 같은 지구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중국이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여도 미국이 계속 온실가스를 배출한다면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모든 국가가 환경 규제를 따라야 한다. 어떤 국가가 자국 경제 성장 둔화를 감수하면서 혼자 규제를 따르겠는가. 콜버트의 책과 다른 이들의 저작이 인류가 너무 늦기 전에 이를 깨닫게 도와주기를, 희망을 가져본다.

앨저넌에게 꽃을

대니얼 키스 지음|김인영 옮김|동서문화사
|351쪽|1만원

이 소설의 앞부분 몇 챕터는 수시로 틀리는 맞춤법과 의도적으로 어눌한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런 책을 난생처음으로 접했을 때 내가 느낀 인상은 대단히 특별한 것이었다. 이 소설은 찰리라는 지적 장애인에 대한 이야기이다. 찰리는 자신을 똑똑한 사람으로 만들어 줄 의학 실험에 참여한다. 소설은 그가 자신의 경험을 직접 기술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 형식을 통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은, 찰리는 글을 쓰는 것도 생각을 하는 것도 서툰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이해할 능력이 없다. 하지만 머리를 좋게 만드는 그 수술이 서서히 효과를 나타내면서 그의 사고 능력과 글쓰기 능력은 날이 갈수록 향상된다.

우리는 그의 단순했던 사고가 점차 정교해지는 과정을 보게 된다.

이 소설은 완전한 픽션은 아니고, 미국에서 지적 장애인 지원자들이 참여해 실제로 이루어졌던 의학 실험에 바탕을 두고 있다.

앨저넌은 찰리보다 먼저 수술을 받아 뛰어난 지능을 갖게 된 쥐의 이름이다. 같이 미로 게임을 하는 이 실험쥐에게 찰리가 처음 느낀 감정은 경쟁심이었다. 앨저넌은 미로 속을 돌아다니면서 출구를 찾고 찰리는 연필을 들고 종이에 그려진 미로를 따라가며 길을 찾는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찰리는 유일하게 자신처럼 급격한 지능 발달을 겪은 앨저넌과 마침내 친구가 된다.

왜 쥐와 친구가 되었을까?

책의 들머리에는 플라톤의 ‘국가’에서 한 구절이 인용되어 있다. 동굴에 갇힌 사람과 그곳에서 벗어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인데 하도 이렇게 저렇게 반복되는 이야기라, 들어본 사람들이 적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요점은, 바보들만 사람들에게 배척당하는 것이 아니라 똑똑한 사람들의 운명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이다. 인간 집단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는 부류는 지나치게 똑똑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딱 평균적인 사람들뿐이라는 것이다. 보통 사람보다 지능이 높아진 찰리는 분명히 다른 것을 기대했겠지만, 예전과 똑같이 따돌림을 당하면서 그 깨달음을 얻는다. 확실히 그는 예전처럼 지적 장애인, 즉 사람들이 무시할 수 있는 대상은 아니었다. 문제는 그가 사람들의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는 데 있었다.

좋은 소설이란 무엇이냐는 어려운 질문을 가끔 받는다. 나의 대답은, 좋은 소설은 모두 성장 소설이라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무지한 주인공이 조금씩 세상의 이치를 깨달아 가는 과정을 독자들이 함께하는 것, 그것이 성장 소설이다. 이 소설에서 우리는 찰리에게 감정 이입을 하면서 지능에 대해, 그리고 지능이 열어 주는 가능성과 외로움에 대해 알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대니얼 키스의 ‘앨저넌에게 꽃을’은 아주 모범적인 성장 소설이다.

책을 읽는 동안 깨달았던 것은, 나 역시 살면서 조금씩 머리가 좋아지는 과정을 지나왔다는 사실이다. 단지 조금 좋아진 것으로, 무한한 가능성을 염두에 둘 때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다. 내가 글을 쓰는 목적은 이 소설에 나타난 것과 같다. 내 뇌가 지닌 모든 가능성을 탐색하고 독자들에게도 내가 받은 것과 똑같은 자극을 주기 위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