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김선영(26)씨는 원래 고추가 듬뿍 들어간 매운 음식을 좋아했다. 하지만 요즘은 고추냉이(와사비)에 푹 빠져 있다. 튜브 형태로 짜서 먹는 고추냉이 소스를 집에 여러 개씩 사다 놓고 어떤 음식이든 곁들여 먹는다.
가장 좋아하는 메뉴는 '고추냉이 비빔밥'이다. 흰밥에 설탕 반 큰술과 식초 1큰술 반을 넣고 소금으로 간 한 다음 날치알과 게살, 오이 등을 올리고 고추냉이 1작은술을 넣어 비벼 먹는다. 김씨는 "매운맛을 내는 고추 성분인 캡사이신만 잔뜩 넣은 음식은 쉽게 질리고, 먹고 나면 속도 좋지 않아서 대신 고추냉이를 찾게 됐다"며 "고추냉이를 먹다가 코끝이 찡해지면서 눈물이 맺힐 때 잠시나마 현실의 걱정거리를 잊을 수 있다"고 말했다.
한동안 식품업계는 '누가누가 더 맵나' 치열한 경쟁을 벌여왔다. '진짜 맵다'(리얼 핫 양념치킨·또래오래)거나 '충격적으로 맵다'(쇼킹 핫 양념치킨·네네치킨)는 이름의 치킨이 속속 등장했고, 매운 라면(불닭볶음면·삼양식품)으로 모자라 그보다 두 배 매운 라면(핵불닭볶음면)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빨간 매운맛' 열풍에 이어 이제는 톡 쏘는 고추냉이의 '초록 매운맛'이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미각보다는 통각(痛覺)을 자극하는 빨간 매운맛에 질리면서 음식 본연의 맛을 크게 해치지 않는 녹색 고추냉이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배추과 식물인 고추냉이 뿌리에는 매운맛을 내는 시니그린 성분이 들어 있다. 휘발성이 강한 시니그린을 먹으면 증기가 코로 올라와 순간적으로 톡 쏘는 느낌을 준다. 반면 고추에 함유된 캡사이신 성분은 휘발성이 약해 혀를 얼얼하게 만드는 매운맛이 입안에서 오래 지속된다. 혀를 자극하는 캡사이신이 음식에 많이 들어가면 식재료 고유의 맛을 느끼기 어려워진다.
식품업계는 지난해부터 고추냉이가 들어간 제품을 쏟아내고 있다. 작년 9월 빙그레 '꽃게랑 고추냉이'가 월평균 48만 봉지 넘게 팔리며 인기를 끌자 해태제과 '자가비 고추냉이맛', 오리온 '눈을감자 와사비맛'도 출시됐다. 올해 상반기에는 고추냉이와 마요네즈를 섞어 먹는 라면인 삼양식품 '와사마요 볶음면', 프라이드치킨에 고추냉이맛 가루를 뿌려 먹는 페리카나 '와사비톡'도 나왔다.
이 밖에도 김, 아몬드, 누룽지 같은 다양한 음식에 고추냉이를 더한 식품이 쏟아지고 있다. 온라인 쇼핑몰 G마켓에 따르면 지난해 고추냉이 관련 식품 판매는 1년 전보다 33% 늘어난 반면, 캡사이신 관련 식품 판매는 7% 증가에 그쳤다. 문정훈 서울대 농경제사회학부 교수는 "캡사이신 농도를 올리는 경쟁이 한계에 다다른 것"이라며 "매운맛을 식품에 잘 녹여내지 못하고 단순히 매운맛 성분만 잔뜩 넣은 식품은 인기를 유지하기 어렵다"고 했다.
집에서 혼자 술을 즐기는 '혼술족'이 늘면서 고추냉이 인기에 불이 붙었다는 분석도 나온다. 빙그레식품연구소 박현석 부장은 "최근 가벼운 안줏거리로 과자를 찾는 혼술족이 많아져 아이 입맛이 아닌 어른 입맛에 맞는 과자를 개발하고 있다"며 "고추냉이맛 과자의 경우 일본식 선술집에서 고추냉이맛 안주를 맛본 소비자를 겨냥했다"고 말했다.
음식평론가 강지영씨는 "맛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자극적인 매운맛에 가려져 있던 한식 고유의 맛을 찾으려는 사람이 늘고 있다"며 "고추냉이, 산초, 생강처럼 식재료 맛을 살리면서도 매운맛을 더할 수 있는 향신료가 인기를 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