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게도 6월마다 여름휴가를 가게 된다. 재작년에는 홋카이도 자전거 여행을, 작년에는 캄차카 반도 트레킹을, 올해는 두 주짜리 유럽 여행을 하고 막 돌아왔다. 한국 현대시 소개라는 숙제를 낀 휴가였다. 날은 시원했고, 공기는 달았으며, 음식까지 맛있었다.

이탈리아 베네치아 리알토(Rialto) 다리. 베네치아를 상징하는 이 다리는 1800년대까지만 해도 대운하 사이를 걸어서 건널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고 한다.

6월 휴가는 좋은 점이 있다. 무엇보다 사람이 많지 않다. 특히 베네치아 같은 곳은 바캉스 기간 사람 물결에 치여 다닌다. 그러다 보면 내 의지는 사라지고 가능한 몇 가지에 만족해야 한다. 그런데 6월엔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대부분 한적하고 친절하다. 하루에 몇 가지 일을 보고도 쉴 수 있는 여유가 생기는 것이다. 덕분에 뜨거운 여름을 견딜 힘을 잘 채우고 왔다.

그렇다고 여행이 즐거운 것만은 아니다. 집 나가면 고생이라고, 여행 짐도 풀었다 꾸려야 하고, 낯선 길에서 헤매기도 해야 하며, 때로는 밥 한 끼 먹자고 요령부득 외국어와 싸움도 해야 한다. 시차 적응까지 부담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떠나고 싶어 한다.

늘 그래 왔듯 이번 여행에서도 나는 기록을 위해 짬짬이 페이스북에 흔적을 남겼다. 페친들의 일치된 반응은 부럽다는 것이었다. 열심히 일하고 있을 그들을 생각하면, 미안하고 조심스러울 정도였다. 그런데 이런 반응은, 우리의 일상이 꽤나 힘들어서 떠나는 일을 무작정 동경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번 여행에 나는 예정된 세미나 탓이기도 했지만, 준비를 전혀 하지 않았다. 베를린과 본은 낯선 도시였고, 베네치아는 20년 전에 다녀온 게 전부였는데도 굳이 여행 정보를 알려 하지 않았다. 출장 자체가 이미 의미 있어서, 나머지에 어떤 목적을 따로 부여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남는 시간 가능한 한 우연에 기대며 도시를 쏘다니는 산보객의 재미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베를린에서는 구동독 콘체르트하우스 실내 투어와 무료 연주회에 참석했고, 시내 대공원에서는 자전거 경주와 함께 열린 박람회에서 자전거 용품들을 원 없이 보았다. 행복했다. 기대하지 않았던 선물이었기에 더욱.

물론 대가도 치렀다. 베네치아의 숙소는 수녀원 한쪽을 대학 게스트하우스로 쓰는 곳이었다. 조용한 동네였다. 문제는 택시가 다니지 않는 지형 특성상, 많이 걸어야 했다는 점이다. 마침 논란 중인 데이미언 허스트 전시가 있다는 신문기사를 본 터라, 일 마친 오후 나는 전시장인 팔라초 그라시로 향했다. 시내 구경을 할 겸 슬슬 걸었더니 거의 두 시간이 걸렸다.

문제는 돌아온 다음이었다. 동네 카페에 앉아 쉬면서 우연히 벽에 걸린 지도를 보니, 팔라초 그라시가 숙소에서 불과 20분 정도 거리에 있는 게 아닌가! 난 반대 동선으로 빙 돌아 그 몇 배의 땀을 흘리며 지중해의 햇살 세례를 받은 것이다.

처음엔 잠시 나의 무신경을 자책했다. 불과 20분짜리 지름길을 몰라보다니! 그런데 생각해보니, 내가 걸은 길은 베네치아의 가장 중요한 장소들을 거쳐 가는 것이었다. 로마 광장, 산타 루치아 역, 리알토 다리, 산 마르코 광장 등등. 그 무심한 산보 덕분에 어쩌면 모르고 지나쳤을 베네치아의 속살을 모두 들여다볼 수 있었던 것이다. 걷다가 이름 모를 광장의 나무 그늘 아래서 따 먹은 달콤한 오디 맛은 덤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돌아와서 마신 진저에일의 상쾌함과 더블 에스프레스의 쓰고 고소한 맛을 놓쳤을 게 아닌가?

그러자 여행 중간 기착지로 덤덤했던 베네치아가 갑자기 친근해지기 시작했다. 커피 한 잔에 1유로를 받는 그 작은 동네 카페에서 나는 아이처럼 천진하게 웃기 시작했다. 이것으로 되었다. 익숙한 시공간을 떠나온 여행자가 얻어야 할 선물이 바로 이게 아닌가! 효율적 목표 달성이라는 의미의 감옥 대신, 새로운 나를 발견하는 재미의 천국을 잠시라도 맛보는 일. 그래서 우리는 떠나고 싶어 하는 것이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