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남준 스포츠부 기자

2014년 9월 부임한 울리 슈틸리케 한국 축구대표팀 감독은 여느 감독들과 여러모로 달라 보였다. 그는 매 경기 그라운드에 들어서는 선수들과 일일이 손을 마주치며 격려했다. 대화할 때는 권위를 내려놓고 선수들 의견을 수첩에 받아 적었다. 선수들에게 싫은 소리를 하는 법이 좀처럼 없었다.

독일인이지만, 그는 한국에 와서 스페인어를 썼다. 그가 밝힌 이유는 이랬다. "나는 독일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영어를 할 수 있다. 그런데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온 카를로스 아르무아 코치는 스페인어를 쓴다. 통역을 둘이나 두는 건 낭비 아니겠나." 축구협회 법인카드를 써도 될 식사 자리에서 그는 개인 신용카드를 꺼내 들었다.

한국 명절에도 마음을 썼다. 지난 2015년 9월 한가위 때는 한복을 차려입고 서툰 한국말로 "대한민국 국민 여러분, 행복한 추석 보내세요"라고 인사했다. 대한축구협회가 달동네에 찾아가 연탄을 나눠주는 봉사활동을 요청했을 때도 마다하지 않았다. 국내 축구팬들은 '좋은 사람' 슈틸리케에 열광했다.

그런 슈틸리케 감독이 15일 경질됐다. 지난해 9월 시작된 2018 러시아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에서 슈틸리케 감독이 이끄는 한국 대표팀은 최악의 부진을 보였다. 한국 축구라면 벌벌 떨던 중국에 7년여 만에 충격적인 0대1 패배를 당했다. 지난 14일에는 중동의 약체 카타르에 2대3으로 무릎을 꿇었다. 한국이 카타르에 진 건 33년 만이었다. 8회 연속 이어져 온 한국의 월드컵 본선행이 말 그대로 위태로워졌다.

이길 때는 모든 것이 다 잘 돌아간다. 감독 지시가 없어도 경기가 술술 풀리고 언론도 갈채를 보낸다. 문제는 위기 상황이 닥쳤을 때다. 적들은 약점을 사정없이 파고들고, 믿었던 선수들이 공개적으로 불만을 표시한다. 응원을 보내던 팬들도 언제 열광했느냐는 듯 차갑게 돌아선다.

좋은 지도자는 위기가 닥쳤을 때 비로소 돋보인다. 에메 자케 전 프랑스 대표팀 감독이 대표적인 사례다. 자케 전 감독이 이끈 프랑스는 1998년 자국에서 열리는 월드컵 개막을 1년 앞두고 치른 4개국 토너먼트에서 3위에 머물렀다. 당시 "프랑스에서 열리는 월드컵이 코앞인데 이런 식이면 본선에서 웃음거리만 된다" "당장 사퇴하라" 등의 질타가 이어졌다. 위기 상황에서 자케는 빠르게 대응했다. 프랑스 축구의 전설이 되는 당시 유망주 티에리 앙리, 다비드 트레제게 등을 과감하게 기용해 새로운 태세를 갖췄다. 선수단은 그의 지도 아래 하나가 됐고, 결국 프랑스는 첫 월드컵 우승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한국 축구 대표팀을 향한 경고음이 요란하게 울린 지 이미 오래다. 하지만 슈틸리케 감독은 자케 전 감독 같은 위기 돌파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지도자에게는 사명(使命)이 부과된다. 좋은 사람이 되는 것만으로는 그 사명을 부여한 이들을 만족시킬 수 없다. 슈틸리케 감독은 '좋은 사람'이었지만 '좋은 지도자'는 아니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