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수 공장? 하도 힘들어서 문 닫아 삣다. 용쓸 만큼 써봤는데 안 되더라…" 지난달, 처갓집이 있는 밀양시 하남읍 수산리로 가족 여행을 갔다가 우연히 만난 아내의 '아재'가 한 말이었습니다. 처갓집 식구들이 아재라 부르는 아내의 친가 쪽 어르신은 얼마 전까지 선친에게 물려받은 국수 공장을 운영했습니다. 수산리에는 오래전부터 국수 제조업이 성업하고 있는데, 여전히 전통 방식으로 국수를 뽑아내 며칠간 자연 건조하는 국수 공장이 있습니다. 지역주민 사이에서 '수산국수'라는 이름의 국수가 유명하고 밀양시는 지역색을 살려 매년 '밀양 세계국수축제'를 열기도 합니다. 처갓집을 찾을 때 가끔 만나는 아재는 자신의 공장에서 직접 만든 수산국수 몇 꾸러미를 챙겨 주셨습니다. 일종의 소면인 아재표 국수는 참 맛났습니다. 삶은 후 오래 두어도 쫄깃함을 잃지 않았고 목 넘김이 일품이었죠. 파스타를 연상케 할 정도로 꽤나 굵은 아재표 국수는 달달한 일본식 간장인 쯔유에 살짝 담갔다 입에 넣으면 청주와도 묘한 마리아주를 이뤄 술안주로도 훌륭했습니다. 아재가 국수 공장 문을 닫은 이유는 다양합니다. 마트에는 대기업에서 생산한 다양한 면 제품들이 가득하고, TV에서는 스타들이 등장하는 화려한 면 제품 광고가 이어집니다. 중소기업에도 속하지 못하는 아재의 국수 공장이 끼어들 틈새가 없습니다. 아재는 특히 세금 부담이 컸다며 멀리 허공을 바라보았습니다. 아재의 국수 공장은 결국 2대째에서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이쯤에서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한국의 럭셔리 브랜드는 무얼까 생각해봤습니다.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브랜드가 없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한국에서는 대대로 가업을 이으며 브랜드의 전통과 아이덴티티를 일궈내는 문화를 찾아보기 쉽지 않다는 점에서 원인을 찾아봅니다. 세계적인 럭셔리 브랜드와 한국의 어느 지방에 있는 작은 국수 공장을 연관시키는 논리에 고개를 갸우뚱하는 이들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많은 럭셔리 브랜드가 초기 소규모 가족 경영에서 출발해 대를 이으며 지금의 거대 기업으로 성장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큰 무리는 아닙니다. 아버지에서 아들로, 아들에서 손자로 가업의 바통을 전하면서 브랜드만의 개성과 기술을 축적하고, 그 토양 위에서 당대 찾아볼 수 없는 혁신적인 제품이 탄생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혁신적인 제품은 브랜드의 아이덴티티를 이뤄 대중의 머릿속에 브랜드의 이미지를 각인시킵니다.
프랑스의 까르띠에는 설립 초기 주얼리 전문 브랜드로 이름을 알렸는데, 1904년 '산토스'라는 혁신적인 시계를 선보이면서 브랜드 아이덴티티에 큰 변화를 맞게 됩니다. 1847년 보석 세공사인 루이 프랑수아 까르띠에가 파리 '몽토르게이(Montorgueil)' 29번지의 보석 아틀리에를 인수하면서 까르띠에의 역사는 시작됩니다. 이후 사업을 물려받은 창업주의 아들 알프레드 까르띠에가 1899년 상류층이 모여 사는 파리 '뤼 드 라 뻬(Rue de la Paix)' 13번지로 회사를 이전했고 사업은 더욱 번창했습니다. 알프레드 까르띠에는 다시 세 아들에게 주요 업무를 맡기는데, 장남 루이 조세프 까르띠에는 파리의 회사를, 자크 테오뒬 까르띠에는 런던의 회사를, 삐에르 카미유 까르띠에는 뉴욕의 회사를 맡아 성장을 거듭했습니다. 그런데 유독 시계에 관심이 많던 루이 조세프 까르띠에는 브랜드 특유의 보석 세공술을 활용한 화려한 벽시계와 탁상시계를 만들며 당대 시계 장인들과의 공동 작업으로 시계 기술을 축적했습니다. 그러던 중 루이 조세프 까르띠에는 친구이자 비행사인 알베르토 산토스 뒤몽으로부터 "비행할 때마다 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내 보기 불편하다"는 고충을 듣게 됩니다. 당시 휴대할 수 있는 시계는 쇠줄 달린 회중시계가 대부분이었기에 루이 조세프 까르띠에는 친구를 위해 비행 중에도 편하게 시간을 볼 수 있는 시계를 고안해냈습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가죽 스트랩을 채택한 최초의 손목시계 산토스였습니다. 친구 이름을 딴 산토스는 큰 인기를 끌었고 까르띠에라는 이름 앞에 '프랑스를 대표하는 주얼리·워치 브랜드'라는 타이틀을 달아주었습니다.
남다른 끈기와 집념, 비즈니스 감각으로 대를 이으며 성장해온 해외 럭셔리 브랜드를 살펴보니 마음이 헛헛해집니다. 오늘 밤 집에 가면 찬장에 남겨둔 한 그릇 분량의 아재표 국수와 청주 한잔으로 '마지막 수산국수 만찬'을 즐길까 합니다. 아예 다가오는 주말, 수산리 아재 댁을 방문해 "국수 공장의 대를 이어보겠다"고 청해볼까요? 창밖이 벌써 어둑합니다. 일단 정신을 가다듬고 두 번째 'The Boutique' 마감부터 마무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