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오후, 서울 이태원 한 레스토랑이 뮤지션 부녀(父女)의 왁자한 웃음소리로 휘청댔다. 록밴드 '부활'의 기타리스트 김태원(52)과 미국 버클리 음대 작곡과에 재학 중인 딸 김서현(20)이 주인공. "말(言)이 아니라 음악으로 소통한다"는 이 부녀는 이달 20일 첫 방송 한 E채널 '내 딸의 남자들'에서 친구 같은 모습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티격태격 언쟁 벌이다가도 서로를 "좋은 딸", "좋은 아빠"라며 치켜세운다. 전설적인 기타리스트에서 '국민 할매'란 별명으로 예능까지 섭렵한 김태원(이하 아빠)과 독학한 음악으로 중·고교 시절 싱글 앨범 두 장을 발매한 김서현(이하 딸)의 '터프하고 끈끈한' 부녀 이야기다.
인터뷰를 시작하려니 딸이 김태원에게 대뜸 말했다. "아빠, 일어나 봐!" 영문 모르고 김태원이 벌떡 일어서자 딸은 파우치에서 파우더를 꺼내 아빠 얼굴에 찍어 발랐다. "아빠, 사진 잘 나와야지." 갸름한 얼굴과 눈매. 마주한 얼굴이 데칼코마니처럼 닮았다. 사진은 인터뷰가 끝난 뒤 찍을 예정이라 말하자 딸은 멋쩍어하면서도 검지로 아빠 얼굴에 묻은 파우더 뭉치를 펴 발랐다. 흐뭇한 표정으로 소파에 착석한 김태원이 '아빠 미소' 띠며 경쾌하게 말했다. "시작하시죠!"
―싱어송라이터인 딸(활동명 크리스 레오네)에게 기타를 한 번도 알려준 적 없다지요?
딸= "아빠는 집에서 기타를 안 쳐요(웃음). 기타를 독학했어요. 곡은 중학교 때부터 스스로 만들었고요. 한국으로 치면 고등학교 1학년, 3학년 때 싱글 앨범을 발표했지요. 음악을 전문적으로 배워본 적이 없어서 부족함을 느꼈고, 이를 메우려고 미국 버클리 음대로 진학했습니다. 주로 하는 음악은 아빠 주전공인 '록'이고요."
아빠= "중학교 1학년 무렵, 서현이가 통기타를 들고 와 직접 연주를 했어요. 혼자 녹음실 다니면서 알아서 작업도 했고요. 결과물 보고서 깜짝 놀랐습니다. 같은 록이라도 제가 동양적인 느낌이라면, '이 친구'는 서양적인 느낌을 쉽게 받아들여서 동서양이 섞인 음악을 하고 있었어요. 초연작(初演作)치고는 꽤 훌륭했죠. 죄다 영어라서 알아듣기는 조금 어려웠지만(웃음)." 김태원은 딸을 종종 '이 친구'라고 지칭했다. 친구 같은 아빠, 함께 음악 하는 동료의 느낌이 호칭에 자연스레 묻어나는 것만 같았다.
딸= "열여섯 살 때 필리핀에서 다니던 국제학교를 그만두고 한국으로 돌아왔어요. 8년 동안 영어권 국가에서 생활하다 보니 영어가 더 익숙해졌고요. 그래서 가사도 영어를…(웃음)."
―서로 떨어져 있는 시간이 길었는데요.
아빠= "둘째 아이가 자폐를 앓았습니다. 충격이 컸죠. 둘째가 위기에 처해 있다고 생각을 하니까 서현이를 돌볼 틈이 없었어요. 그래서 엄마와 필리핀도 갔던 거고. 딸아이가 가장 예쁠 때, 딸 가진 부모가 흔히 말하는 '황금기'를 함께 보내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크죠."
딸= "스스로 '살길'을 찾다 보니 만난 게 음악이었어요.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 고독, 우울과 싸우는 방법을 터득해야 했죠. 이런 경험이 음악적 자산이 된다고 생각해요. 대학 들어와서 한 학기 동안 여덟 곡을 작곡해야 하는데, 곡 쓸 때마다 아빠 생각이 많이 나요. 얼마 전 아빠가 많이 아프셨을 때 '부활' 1집부터 13집을 쭉 들은 적이 있어요. 무의식적으로 들어오던 아빠 음악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 사이 활동이 뜸하던데 건강상 이유였나 봅니다.
아빠= "작년쯤 패혈증으로 위험했었어요.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조울증에도 시달렸고. 나 자신과 싸워야 할 격전(激戰)의 포인트고, 그 무렵 곡이 나옵니다. 좋아하는 술도 잠시 끊었습니다. 몸이 크게 고장 나면 안 먹고, 좀 나아지면 또 먹고, 고장 나면 또 안 먹고…. 보통 사람 다 그러지 않나?(웃음)" 일순간 딸의 얼굴이 굳었다.
딸= "아빠가 제발 살아만 있으면 좋겠어요. 패혈증 소식 듣고서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다음 날 바로 비행기 티켓 끊어서 한달음에 달려왔죠. 심각한 문제야! 아빠 건강."
아빠= "이 친구 바람은 제가 최선을 다해서 이루어보겠습니다(웃음)."
―아빠가 딸의 연애를 들여다보는 방송에 출연 중입니다.
아빠= "감추고 숨기면 부작용만 커져요.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는 시대 아닙니까? 비밀 없는 부녀 사이를 지향해요."
딸= "부모님께 사생활을 일일이 이야기하진 않지만, 일부러 숨기지도 않아요. 연애는 딴 사람들도 다 하는 거잖아요. 나쁜 것도 아니고요. 외국 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불편함이 혹여 있지는 않을까 걱정은 했어요."
―사생활을 보여주는 게 쉽지는 않았을 텐데요.
아빠= "음악 하는 사람이라 (제가) 기존 아빠들 스타일하곤 많이 다르죠. 일단 저 스스로 이성에 대해서 자유분방했기 때문에…(웃음). 연애하다가 헤어지면 상처가 되지만 대신 음악적인 자산이 됩니다. 딸의 연애를 아빠가 아니라 친구의 입장에서 바라봐요. 아빠와 딸이라는 건 태생적인 바탕에 깔아두는 거고. 인생 살아갈 땐 적어도 친구처럼 살아야 하지 않나. 예전 아버지상도 틀린 건 아니지만, 이런 가족도 있다는 걸 보여 드리고 싶었어요."
딸= "친구 같은 사이라서 연락도 자주 안 해요(웃음)."
아빠= "한국은 유독 부모·자식 간 애착 관계가 커요. '미련'이죠. 옆에 붙어서 감시하는 건 친구가 아녜요. 멀리서 바라봐줘야 큰 그림을 볼 수 있습니다. 가끔 자녀에게 얽매인 부모를 보면, 그거 하려고 태어난 것 같아요. 자식도 시키는 대로 공부만 하다 보니 '지식'만 있고, '지성'은 없는 성인으로 자라요."
―두 사람의 생각이 참 많이 닮았습니다.
아빠= "4~5년 전쯤 할아버지 생신이라 서현이가 중국집에 갔어요. 이 친구가 코스 요리를 처음 먹어보는데, 죽 같은 게 나오니까 '이거 뭐냐'고 묻더라고요. '샥스핀이라는 상어 지느러미 요리다'라고 하니까 얼굴색이 싹 변하는 거예요. 그린피스에 관심이 많았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어요. 사색(死色)이 되는 모습을 보고서 뮤지션의 피가 흐른다고 생각했지. 아, 의롭다. 가끔 부모 속은 썩이지만(웃음) 의로운 사상을 가지고 있구나. 말이 아니라 그런 느낌을 통해서 딸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피스(peace)! 중요하지 않습니까?"
딸= "우리는 필링(feeling)으로 소통해요. 스쳐 지나가는 눈빛이나 느낌을 중시해요. 그 느낌의 마지막 단계가 결국 음악인 거고요. 곡 하나를 완성해 아빠에게 들려줌으로써 진정 소통하는 것이죠."
아빠= "맞습니다. 언어는 별로 사용을 안 합니다. 잘 통하지도 않을뿐더러 서현이가 한국말을 잘 모르니까(웃음). 음악 말고는 소통할 게 없어요. 제가 바라는 건 서현이가 음악으로 스스로를 위로하고, 남에게 곡으로써 위로를 주는 인생 그게 전부예요. 음악이 우리의 언어니까요." 부녀의 죽이 맞았다. 인터뷰가 끝나자마자 딸은 다시 파우더를 집어 들었다. "이제 사진 찍는 거죠?" 김태원은 무심하게 일어나 딸에게 얼굴을 맡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