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얼마나 화려하게 꾸몄는지가 승패의 관건인 화장품 세계에서 맨 얼굴로 승부하는 화장품 브랜드가 있다. 영국의 코스메틱 브랜드 '러쉬(Lush)'이다. 러쉬는 화장품 업계에서도 조금 독특한 위치에 있다. 일단 화장품 회사에서 당연하게 생각하는 화려한 포장이 없다. 제품을 재래 과일 시장처럼 진열하고 치즈나 고깃 덩어리를 자르듯이 떼어내 판매한다. 제품의 원료는 대부분 자연에서 얻은 것들이며 이에 대한 동물 실험을 하지 않는 것이 철칙이다.

러쉬 매장 안 모습

러쉬는 최근 윤리적 소비가 뜨고 사회적 가치를 중요시하는 현명한 소비자가 늘어나면서 연평균 10%씩 성장하고 있다. 하지만 단순히 좋은 일 하는 것만으로는 소비자의 마음을 사로잡기 힘든 시대. 성장과 윤리를 동시에 챙길 수 있었던 러쉬의 숨겨진 매력과 노하우를 살펴봤다.

키워드 탐구

화장품 회사이지만 목욕제품과 바디용품이 유명하다. 소셜 네트워크 사이트에서도 비누와 입욕제 언급이 가장 많다. 같은 사이트에서 입욕제로 연관어 검색했을 때 나오는 키워드 1위는 단연 러쉬이다. 대부분 사람들이 '러쉬=입욕제' 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

한편 보통 화장품 브랜드에서는 잘 언급되지 않는 식재료들이 눈에 띈다. 파슬리, 토마토, 오렌지 등이 10위권에 들었다. 식재료를 그대로 쓰는 제품명이 많기 때문에 나오는 당연한 결과이지만, 이런 점을 고려하더라도 다른 자연주의 화장품 브랜드에 비해 재료에 대한 언급이 높은 편이다. 천연 재료를 사용한다는 원칙이 있는 만큼 제품의 원료에 대한 관심이 역시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셜 네트워크 사이트에서 언급되고 있는 '러쉬'의 연관 감성 키워드는 대부분 긍정적이다. '인정하다', '좋다'라는 단어가 각각 1위와 2위를 차지하고 있고 그 밖에 '예쁘다', '추천하다'라는 단어가 그 뒤를 잇고 있다. 러쉬에 갖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이미지는 전반적으로 긍정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독특한 것은 다른 브랜드처럼 특별히 예쁜 모델이나 예쁜 용기를 내세우지 않음에도 브랜드에 대한 평가에 '예쁘다'라는 평가가 있다는 점이다. 소비자들은 재래시장과 같은 독특한 매장 분위기와 천연 색소로 만들어진 알록달록한 제품들을 기존 화장품과는 다른 '독특한 예쁨'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러쉬의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바로 향이다. 근처에 러쉬 매장이 하나 있으면 그 일대에 향이 퍼질 정도로 제품 대부분이 강하고 인상적인 향을 가지고 있다. 이런 향 때문에 호불호가 갈리기도 하지만, 러쉬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가장 매력적인 요소이다. 소셜 네트워크에서도 향과 냄새는 러쉬를 얘기하는 속성 중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였다. 러쉬의 대표 마크 콘스탄틴은 "일부러 향이 좋은 제품을 만들었는데, 포장재로 꽁꽁 싸매 놓으면 고객이 그 냄새를 맡아보기 어렵지 않느냐" 굳이 포장하지 않는 이유에 이렇게 밝히기도 했다.

히스토리 탐구

핸드메이드 코스메틱 회사 러쉬의 설립연도는 1995년이지만 모태가 된 회사가 만들어진 것은 197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국의 작은도시 풀(Poole)의 한 헤어 뷰티 살롱에서 만난 미용사 마크 콘스탄틴(Mark Constantine)과 뷰티 테라피스트 리즈 위어(Liz Weir)는 식물성 원료로 하는 뷰티 사업을 구상한다. 'Herbal Hair and Beaty Clinic' 이름을 달고 허브를 활용한 뷰티 제품을 팔았는데 이 자연주의 컨셉은 당시에는 무척이나 생소한 개념이어서 처음에는 판매가 부진했다.

(왼쪽부터) 러쉬의 창립자이자 대표 마크 콘스탄틴, 러쉬 1호점, 러쉬의 창립멤버들, 공동 창업자 리즈 위어

진정한 혁신은 아이디어를 이해해주는 동반자를 만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1980년 초 이들은 제품 철학을 알아주는 더바디샵 창업자 애니타 로딕과 거래를 트면서 사업을 지속할 수 있게 된다. 이를 바탕으로 페퍼민트 풋 로션, 허니 비즈왁스 클렌져, 허벌 헤어 컬러, 바디 버터 등의 제품을 개발하며 회사는 점점 커갔다. 고객을 돕는 업무를 담당하는 로웨나와 당시 고객이었던 헬렌, 그리고 폴, 칼을 만난 것도 이 무렵이다.

'Lush'라는 회사명 역시 고객이 만들어 준 이름이다. 90년대 이들은 '코스메틱스 투 고(

Cosmetics

to

go

)'라는 회사를 창업해 통신 판매 사업에 뛰어들었는데 물량과 주문 건수 관리 부실로 회사가 매각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밑바닥에서 다시 시작해야했던 창립자들은 회사를 재건하고 고객들을 대상으로 새로운 이름을 받았다. 이 중 스코틀랜드 출신 엘리자베스 베넷이라는 고객이 제안한 '신선한, 녹색인, 신록'을 뜻을 가진 러쉬가 회사명이 되었다.

한때 CEO로 있었는 앤드류 게리(Andrew Gerrie) 역시 고객이었다가 후에 합류한 인물이다. '코스메틱스 투 고' 고객이었던 게리는 통신판매가 중단되자 "면도크림을 사려고 하는데 왜 팔지 않느냐"고 문의하다가 러쉬의 멤버에 합류했다. 투자전문가였던 게리가 새로 투자를 받아 런던 도심에 처음으로 매장을 열면서 이들의 사업은 다시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Lush는 빛나는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과 그 가치를 알아본 사람들이 함께 의기투합해서 키워 온 회사이다. 초창기 함께했던 여섯명은 여전히 러쉬의 공동창립자로 함께 일하고 있다.

매력 탐구

러쉬의 제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담은 영상 속 장면, 포장하지 않은 물건들을 그대로 진열해놓은 러쉬 매장

러쉬말고도 자연주의, 천연을 내세우는 화장품 브랜드들은 많다. 하지만 러쉬가 천연 화장품 중에서도 꾸준히 소비자의 마음을 살 수 있었던 이유는 진정성과 신뢰에 있다. 소비자들이 러쉬를 바라볼 때 "저 회사는 마케팅으로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라는 믿음을 가지게 해준 것이다.

러쉬의 제품들은 자연치유 효과가 있다고 알려진 식물과 꽃, 열매를 사용해 만드는데 이 과정을 홈페이지나 유투브 영상을 통해 과감하게 오픈한다. 영상을 보고 있으면 화장품을 만든다기 보다는 요리 영상을 보는 듯하다. 이렇게 대부분 제품이 공장식이 아닌 핸드메이드로 생산된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브랜드 철학을 드러내고 신뢰도를 쌓아왔다.

다 만들어진 제품을 마치 과일 상점처럼 날것 그대로 내놓은 진열한 매장도 마찬가지다. 예쁜 용기와 화려한 포장 없이 있는 제품 자체만을 보여주는 매장은 이들이 얼마나 제품에 확실한 신념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브랜드 컨설팅 회사인 JOH의 조수용 대표는 "가식적이라고 볼 수 있을 만큼 고급스러움과 세련미를 강조하는 다른 화장품 회사들과 달리 러쉬는 제품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진열함으로써 제품 본연의 물성을 그대로 드러내는데 오히려 이 때문에 진정성이 강조된다"고 말했다.

포장이 필요할 때는 재활용이 가능한 포장지나 용기를 사용한다. 용기 겉에는 생산자 뿐만 아니라 포장한 직원의 캐리커쳐와 정보가 그려져 있어 소비자들은 한번 더 '믿고 산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

동물실험 반대 캠페인과 팜오일 사용 줄이기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러쉬

천연 화장품, 자연주의 제품을 확장하여 환경문제와 사회문제에 뚜렷하게 자기 목소리를 내는 브랜드다. 이들은 동물보호, 환경보존, 인권보호 운동 등 지금까지 서른개 이상의 캠페인을 전개하며 상생의 가치를 추구해왔다. 가장 유명한 것이 '동물 실험 반대'. 러쉬는 화장품 회사에서 당연하게 시행하고 있는 동물 실험에 가장 적극적으로 반대한다. 동물 실험을 조금이라도 한 업체와는 절대 거래하지 않으며 중국이 동물 실험을 하지 않은 제품은 수입할 수 없다고 하자 중국에 제품 공급을 중단하며 50조 원 시장을 걷어찼다.

비누에 들어가는 팜 오일의 소비 증가로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의 열대우림이 사라질 위기에 놓이고 그곳의 동물의 생존이 위협받자 제품에 팜 오일을 넣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를 대체하는 다른 천연재료로 비누를 만들고 있으며 다른 업체에도 팜 오일 사용을 줄일 것을 촉구하는 캠페인을 펼쳤다.

제품과 상관없는 환경운동과 사회운동에도 적극적이다. 석유회사들의 석유 추출로 캐나다 타르 샌드의 자연과 거주민들이 고통 받자 이를 막기 위해 '타르 샌드 채취 반대' 캠페인을 전개했다. 탈북자를 지원하는 홍콩의 단체와 위안부 피해 역사 교육 및 자료 보존에 힘쓰고 있는 '민족과 여성 역사관', 청소년 성 소수자들을 위한 단체를 후원하는 등 다양한 계층과 분야에 관심을 갖고 있다.

CEO 인터뷰

러쉬의 창업자 마크 콘스탄틴

―러쉬는 수익성이 높은데, 비결이 뭔가요?
"제품의 포장에 투자하지 않고, 광고에도 거의 돈을 쓰지 않습니다. 그 때문에 수익성이 올라가는 거죠. 큰 회사는 매출의 20~30%를 광고에 쏟아붓습니다. 광고의 단맛을 본 화장품 업체들은 더더욱 광고에 치중하게 됩니다. 어느 순간부터 '도덕적 해이'도 발생합니다. 제품이 어떻든 광고부터 세게 넣죠. 거짓말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최근 시대가 바뀌고 있어요. 모든 정보가 인터넷을 통해 공유됩니다. 소비자들은 이제 더 이상 기업이 말해주는 정보를 곧이곧대로 믿지 않습니다. 그 이면에 있는 것까지 찾아보죠. 이런 소비자들이 늘면서, 돈을 벌고 있는 겁니다."

―20년 전 회사를 세울 때부터 이렇게 될 것을 예측하셨나요?

"그럴 리가요(웃음). 단지 '차별화'를 하고 싶었어요. 원래 조향사(향을 만드는 사람) 출신이라 젊었을 때부터 자연에서 얻은 재료로 화장품을 만드는 데 관심이 많았습니다. 사실 30년 전에도 자연주의를 표방하는 화장품은 있었거든요. 그런데 실제로는 천연 재료를 쓰지 않는 곳도 많다는 걸 알고 실망했어요. 그래서 반대로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①천연 재료를 고집하겠다 ②광고를 하지 않겠다 ③포장을 세련되게 꾸미지 않겠다. 이 세 가지 차별화 포인트가 결과적으로 저희에게 경쟁 우위를 가져다줬습니다."

―러쉬는 캠페인을 많이 하는데, 성장에 악영향을 줄 수 있지 않습니까?
"그건 캠페인과 비즈니스 모델을 동일시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입니다. 많은 회사가 캠페인을 광고처럼 이용하고 이를 통해 더 많은 돈을 벌고자 합니다. '우리 회사는 착한 회사예요. 그러니까 우리 제품을 쓰세요'라고 말합니다. 이건 캠페인이 비즈니스 모델에 포함된 겁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다 보면 시간이 흐르면서 캠페인의 의미가 퇴색되고, 캠페인으로 광고하는 데도 한계가 드러납니다. 사람들이 더 이상 봐주지 않거든요. 그러면 회사가 무너지게 됩니다. 러쉬는 캠페인과 비즈니스를 별개로 봅니다. 정확하게는 비즈니스로 돈을 벌어서 캠페인 벌이는 데 쓰고 있습니다."

―러쉬에 캠페인은 어떤 의미인가요?
"정말 옳다고 생각하는 일이고, 브랜드 정체성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저희는 고래 사냥에 반대합니다.' '동물 실험에 반대합니다.' 만약 소비자들이 저희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억지로 설득하지 않습니다. 소비자가 좋아하면 오고, 싫어하면 오지 않습니다. 캠페인이 중요한 이유가 또 있습니다. 올바른 직원을 채용하는 척도가 된다는 겁니다. 저희 캠페인에 반대하는데 우리 회사에 입사하려는 직원이 있을까요?"

―결과적으로 러쉬는 기업 윤리를 지키면서, 성장도 이뤄냈습니다.
"처음에는 정말 어려웠어요. 아무리 원칙이 훌륭해도 소비자들은 우리 생각만큼 큰 관심을 보내주지 않아요. 많은 '착한 기업'이 여기서 딜레마를 겪습니다. 윤리의 일정 부분을 포기하면 적어도 원가라도 조금 낮출 수 있거든요. 그러나 저희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고 버텼습니다. 그러니 고객들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회사가 어느새 제대로 굴러가기 시작했어요. 사람들이 리먼 쇼크를 겪고 난 다음부터 신뢰라는 가치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게 됐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희가 어느 정도 그런 마음을 충족시켰다고 생각하고요." ▶인터뷰 더보기

또 다른 시선

러쉬 한국매장, 원 안은 한국매장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마스크오브매그너민티

천연 화장품을 지향하고 있지만, 러쉬의 제품에 들어가는 성분이 100% 천연은 아니다. 제품의 성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파라벤, 티타늄디옥사이드, 또는 각종 향료가 첨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다른 화장품에 비해 '천연 재료'를 내세울 수 있는 것은 천연 재료의 함량이 다른 화장품에 비해 높고, 제조과정에서 안전이 검증된 최소한의 인공 성분만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환경과 생산자 구매자까지 생각하는 공정무역을 하는 점을 강조하지만 한국에서 제품 가격은 다른 나라에 비해 비싼 편이다. 이로 인해 한국 소비자들이 자국 내 매장을 이용하기 보다 온라인에서 직구를 이용하거나 영국이나 일본 여행 시 사오는 경우가 많다. 사회적 활동을 전개하는 자연주의 화장품 브랜드가 한국 소비자들의 윤리적 허영심을 자극한다는 비판도 있다.

하지만 러쉬가 펼치는 여러 사회활동 중 여러 사람의 의견이 갈리는 사안의 경우, 브랜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성균관대 구민정 교수는 "러쉬가 벌이는 캠페인 중 동성애 지지 같은 논쟁적인 캠페인은 지역에 따라 반발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면서 "이런 점에서 베네통을 연상시키는데, 대중 시장 마케팅에 부정적일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