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말했다고 전해진 '한국은 중국의 일부였다'는 발언은 1880년대 형성된 중국의 '역사적 질병'이 130년이 지났는데도 치유되지 않고 오히려 더 고질화됐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국제관계사 연구의 석학인 김용구(80) 한림대 한림과학원장은 시 주석의 발언은 개인 생각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만들어진 중국적 사고방식을 드러낸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대 외교학과에서 33년간 국제관계사를 가르치고 연구한 김 원장은 19세기 후반 한국사를 당시 국제관계를 축으로 조명한 '세계관 충돌과 한말 외교사, 1866~1882'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거문도와 블라디보스토크: 19세기 한반도의 파행적 세계화 과정' 등의 저서를 냈다.

한국이 중국의 속국화 압박에서 벗어난 뒤 세워진 독립문 앞에 선 김용구 원장. 김 원장은 “중국이 한국을 바라보는 ‘역사적 질병’의 연원을 우리 국민과 국제사회에 알리는 것이 학자의 사명”이라고 했다.

중국은 전근대 시기 동아시아의 조공책봉 질서가 종주국과 복속국의 지배 예속 관계였다고 주장한다. 김 원장은 "중국과 주변국들의 사대(事大) 질서는 명나라와 청나라의 법규를 모아놓은 회전(會典)에 상세하게 규정돼 있다"며 "티베트·몽골 같은 내번(內藩)은 중국이 관리를 파견해 직접 통치했지만 조선·월남 등 외번(外藩)의 내치와 외교는 자주에 맡겼다"고 설명했다.

이런 원칙에 변화가 생긴 것은 1870년대 후반 청과 러시아 사이에 국경 분쟁이 발생하면서였다. 1880년 러시아와 협상을 성공시킨 증기택(曾紀澤)은 국경을 명확히 하고 중국 주변의 불확실한 지역들을 재편할 것을 황제에게 건의했다. 사대 질서의 '속방(屬邦)'을 근대 만국공법의 '속국(屬國)'으로 만들자는 것이었다. 당시 청나라 주일(駐日) 공사 하여장(何如璋)은 대(對)조선 정책을 담은 '삼책(三策)'에서 조선을 중국의 군현으로 만드는 것이 상책(上策), 정치를 관장할 감국대신(監國大臣)을 파견하는 것이 중책(中策)이라고 주장했다. 청 조정은 이 건의를 받아들여 1881년 대(對)조선 정책을 이홍장과 하여장에게 맡겼다.

1880년 일본에 수신사로 간 김홍집이 청나라 외교관 황준헌에게 받아서 고종에게 올린 '조선책략'도 그의 상사인 하여장과 같은 생각에서 나왔다. 조선이 러시아의 위협에 대처하려면 '친(親)중국·결(結)일본·연(聯)미국'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 책은 보통 조선을 위한 외교 전략 조언으로 소개됐다. 하지만 김 원장은 "조선책략은 '친중국'에 방점이 찍혀 있고 결국 '중국에 들어오라'는 얘기"라며 "고종의 명으로 이 책을 돌려 읽은 대신들은 중국의 의도를 간파하고 위험성을 지적했다"고 말했다.

조선을 속국으로 만들려는 중국의 정책은 갑신정변 진압을 주도한 원세개를 1885년 감국대신으로 파견하면서 실행에 옮겨졌다. 원세개는 조선의 고위 관리를 마음대로 갈아치우고 청나라 상인이 조선 경제를 장악하도록 하고 고종 폐위를 추진하는 등 1894년 청일전쟁 발발 직전 중국으로 도주할 때까지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했다.

중국의 조선 속국화 추진은 청일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중단됐다. 그러나 중국은 이때 형성된 대한관(對韓觀)을 버리지 못했다. 중국이 2003년부터 10년 예정으로 추진한 '신청사(新淸史)'는 아직도 간행되지 않고 있다. 김 원장은 "한국뿐 아니라 러시아 등 주변 국가의 반발과 비난을 우려해서 내용을 조율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은 10년 전부터 베이징대와 칭화대가 돈을 대고 영국 케임브리지대가 발행하는 영문(英文) 국제관계 학술지(Chinese Journal of International Relations)를 통해 자신들의 주장을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있다. 김용구 원장은 "우리도 한·중 관계사의 정확한 실상을 담은 영문 학술지와 영어 저술을 발간해 한국의 입장을 국제사회와 학계에 널리 알려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