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12년 만에 두 번째 가출을 한다. 주미대사 때 한 번, 이번에 한 번.”(12일 자 한겨레신문 인터뷰 중에서)
홍석현 전 중앙일보-JTBC 회장이 회장직을 사퇴한 지 한 달이다. 홍 전 회장은 지난 달 18일 중앙미디어네트워크 전 직원에게 이메일을 보내 “오랜 고민 끝에 저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작은 힘이라도 보태기로 결심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는 중앙일보 지분 29.75%를 보유한 개인 대주주이다. 그가 지배하거나, 그의 영향력 하에 있는 중앙미디어네트워크와 유민문화재단까지 포함하면 지분율이 70%에 육박한다. 회장직을 사임했지만 여전히 중앙일보 사주이다.
언론사 사주인 홍 전 회장이 최근 부쩍 언론에 오르내리는 일이 잦다. 대중 앞에 자신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지난 해 말 홍 전 회장이 자신의 정치철학 등을 담은 에세이 ‘우리가 있기에 내가 있습니다’를 펴냈을 때부터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었다는 의견이 있지만, 최근에는 그 통로가 이른바 진보 성향 매체들인 점이 눈길을 끈다.
◇"꺼지지 않는 촛불과 광장의 태극기에 고뇌했다"(3월18일)
홍 전 회장은 지난 달 18일 저녁 임직원들에게 이메일을 보내 “23년간 몸담아 온 회사를 이제 떠난다”고 했다. “오랜 고민 끝에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작은 힘이라도 보태기로 결심했다"고도 했다.
그는 당시 “최근 몇 개월 탄핵 정국을 지켜보면서 저는 많은 생각을 했다. 광화문광장의 꺼지지 않는 촛불과 서울광장에 나부끼는 태극기를 보며 밤잠을 이루지 못한 채 깊은 고뇌에 잠기기도 했다. 안타까움을 넘어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면서 “남북관계, 일자리, 사회통합, 교육, 문화 등 대한민국이 새롭게 거듭나는데 필요한 시대적 과제들에 대한 답을 찾고 함께 풀어갈 것”이라고 했다.
홍 전 회장은 이튿날 발간된 중앙선데이 창간 10주년 기획 인터뷰에서는 대선 출마설에 대한 확실한 입장을 밝혀달라는 사내 기자들 질문에 “확실한 입장을 밝히긴 어렵다”면서도 “앞으로 뭘 더 할 수 있을까 고민은 하고 있다”고 했다.
◇”차기 지도자는 대타협 성공해야…제가 대타협 조건 만들겠다”
홍 전 회장은 사퇴 후 첫 공식 일정으로 지난 달 26일 자신이 회장으로 있는 월드컬쳐오픈(WCO) 서울 서소문 사무소에서 ‘희망의 나라로’를 주제로 강연했다. 그는 “중앙일보 회장직을 내려놓은 뒤 여러 추측이 돌고 있는 걸 듣고 있다”면서 “차기 지도자는 대타협을 성공하게 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 제가 대타협의 조건을 만들어내고 싶다”고 밝혔다. 대선 출마 여부에 대해선 “정치는 혼자 하는 게 아니다”라고도 했다.
홍 전 회장은 지난 달 29일 아침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김종인 전 더불어민주당 비대위 대표, 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과 만났다. 홍 전 회장은 회동이 끝난 뒤 기자들과 만나 “정치가 산산조각났는데, 어떤 개인에 반대해서 연대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했다. 김종인 전 대표의 대선 출마에 대해서도 “누구를 돕거나 그런 생각은 가지고 있지 않다”고 했다.
세 사람은 이달 2일 다시 만나려 했지만 회동 3시간 전에 무산됐다. 정운찬 전 총리는 다음 날 기자들에게 "저를 비롯해 (김종인 홍석현 포함해) 우리 셋 모두 대통령이 되고 싶어 한다"고 했다.
◇"지식인으로서 역할 찾겠다…대통령 선거에 나설 생각 전혀 없다"
홍 전 회장은 지난 달 박지원 국민의당 대표, 김종필 전 총리 등과 연쇄 회동을 가졌다. 이 와중에 김종인 전 대표가 대선 출마를 선언하면서 홍 전 회장의 거취에도 대중의 관심이 모아졌다.
그러나 홍 전 회장은 지난 12일 한겨레신문 인터뷰를 통해 불출마를 선언했다. 그는 “대통령 선거에 나가겠다는 얘기를 한 적이 전혀 없다. 정치가 저에게 잘 맞는 옷처럼 느껴지지는 않는다. 선출직이라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여러 가지 고민한 것은 사실이다. 대선을 놓고 행보하는 것은 제가 준비되지 않았다. 두 분(김종인·정운찬)은 정치인이고 저는 이제 막 새로운 길을 가보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참여하기가 좀 힘들었다고 할까. 그분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은 공감하고 있다”고 했다.
홍 전 회장은 또 “문재인 안철수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의 당선을 도울 의향은 없느냐”는 물음에 “내 생각을 많이 받아들여주는 사람을 지원하고 싶지만 어느 한 사람을 공개지지선언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기사를 쓴 한겨레신문 기자는 “지인의 소개로 홍 전 회장과의 인터뷰가 성사됐다”고 썼다. 언론계 안팎에서는 “홍 전 회장측이 측근 인사를 통해 한겨레측에 인터뷰를 먼저 요청했다”는 얘기가 돌았다.
◇인터넷 동영상에서 정권 외압 폭로
홍 전 회장은 16일 인터넷 동영상 공유사이트 유튜브에 여러 개의 동영상을 올렸다. 그는 그 가운데 'JTBC 외압의 실체, 이제는 말할 수 있다, 홍석현'이란 제목의 2분6초짜리 동영상에서 JTBC 메인뉴스 앵커인 손석희 교체 문제와 관련해 "(JTBC의 2016년 10월 24일 최순실씨 태블릿PC 보도)그 전에 받았던 구체적 외압이 한 5번에서 6번 된다. 그 중에 대통령으로부터 2번이 있었다. 이번에 밝히는 것이지만 시대착오적인 일"이라며 정권의 외압이 있었음을 폭로했다.
그는 “그때 언론을 경영하는 입장에서, 또 개인적으로 정치적 사건에 연루돼 고초를 치렀던 위협을 느낀 건 사실”이라며 “그렇지만 그런 외압을 받아서 앵커를 교체한다는 건 자존심이 용서하지 않았고, 21세기에 있을 수 도 없는 일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외압을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라고 했다. 한복 차림에 한 한옥에서 찍은 이 동영상에서 그는 “태블릿 PC 보도 이후에는 정권이 약해졌기 때문에 직접적인 외압은 없었다. 다만 태극기 광장에서 저나 제 아들(홍정도 중앙일보·JTBC 사장), 손석희 사장의 이름까지 거론되며 규탄 대상이 됐다”고 했다.
홍 전 회장은 또 ‘노무현의 선택, 홍석현의 선택' 제목 영상에선 자신이 노무현 정부 시절 받았던 공직 제의에 대해 밝히기도 했다. 2분 48초짜리 이 영상에선 홍 전 회장의 사진 위로 그가 쓴 글이 자막으로 올라갔다. 자막과 육성 인터뷰에서 그는 "어느날 노무현 전 대통령께서 제게 유엔 사무총장 한국후보와 주미대사직을 함께 제안하며 한국인의 한 사람으로서 국제사회에서 역할 해줄 것을 요청해온 적이 있다"며 "저는 하루하루 고뇌의 밤을 보냈다. 저의 태생적 배경, 재벌 관련 이미지, 언론사 사주라는 지위가 오히려 많은 것들을 더 어렵게 만들지 않을까 우려됐다. 고뇌의 밤은 매일매일 깊어만 갔다"고 했다.
홍 전 회장은 이어 "노무현 대통령께서는 왜 나, 홍석현을 선택하셨을까…. 그 분 주변에는 능력 좋고 국제 외교무대에서 검증받은 좋은 분들이 많이 계신데. 고뇌의 밤은 한 달이나 갔다"며 "그리고 노무현의 선택을 믿기로 했다. 그 분의 선택이 미래였기 때문이다. 그 분의 선택이 미래라는 믿음 때문"이라고 했다. 홍 전 회장은 비슷한 분량으로 ‘홍석현이 말하는 꿈이 있는 나라’, ‘통일이 살 길이다, 홍석현’ 등 자신의 정치 철학을 밝히는 동영상도 함께 올렸다.
홍 전 회장은 앞서 지난 6일에는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과 인터뷰 형식의 25분짜리 동영상을 올리고, 자신이 생각하는 우리 사회의 과제와 미래 비전 등을 자세히 밝히기도 했다. 이 동영상은 지난달 23일경 한 차례 올라갔다 바로 삭제된 후 다시 등장했다.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대선 출마 생각 있었음 인정
19일에는 진보성향매체 오마이뉴스가 홍 전 회장 인터뷰 기사를 보도했다. 홍 전 회장은 “지난 12일 문재인 후보가 우리 집을 찾아와 식사를 함께 한 자리에서 나에게 외교와 통일과 관련된 내각에 참여해달라고 부탁했다”면서 “하지만 내가 장관으로 내각에 참여할 군번은 아니지 않느냐. 평양 특사나 미국 특사 제안이 온다면 그런 것은 도와드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오마이뉴스는 보도했다. 홍 전 회장은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5년 주미대사를 지냈지만 이른바 ‘삼성 X파일 사건’에서 이름이 거론되자 물러났다.
홍 전 회장은 오마이뉴스 인터뷰에서 ‘이번 대선에서 누가 대통령이 될 것 같으냐’는 질문에 “문재인 후보가 될 가능성이 높다. 안철수 후보는 요즘 하는 게 조금 그렇다”면서 “국회의원 40석을 가진 당의 안철수 후보보다는 120석을 갖고 있는 당의 문재인 후보가 정권을 잡으면 나라로서는 더 안정적이긴 할 것이다. 그런데 과연 잘할지 걱정이 된다”고 했다. 그는 “문 후보가 당선된다면 이 시대를 어떻게 해석하고 자기 역할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가졌으면 좋겠다”면서 “그렇게 된다면 내가 가지고 있는 국제적 인맥과 상징성을 가지고 문재인 정부를 위해서가 아니라 대한민국을 위해서 어떤 역할을 할 수도 있다”고 했다. “지난 20여 년간 국제사회와 북한 문제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특사로서 북한과 미국에 주는 메시지가 있을 것”이라고도 했다.
그는 “문재인 후보랑 내가 만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자 안철수 후보 쪽에서도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면서 “금명간 만날 예정”이라고 밝혔다. 다만 “내가 이번 대선에서 특정 후보를 지지할 수는 없다”면서도 “누가 당선되더라도 나라가 위기인 만큼 통일이나 외교문제 등에 대해 조언은 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홍 전 회장은 이어 오마이뉴스가 ‘19대 대선이 예정대로 12월에 있었으면 대선 출마를 했겠느냐’고 묻자, “사실 마음으로는 여러 준비를 했으니까…”라고 했다. 대선 출마를 생각하고 있었다는 뜻으로 비친다. 그는 “JTBC가 (박근혜 탄핵정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니까 룸(입지)이 더 좁아졌다. (조카인) 삼성 이재용 부회장이 구속되고 여러 상황이 있었다”면서 “(애초 대선 출마 계획이) 막 흔들린 면이 있다”고 했다. 오마이뉴스측은 이 인터뷰 성사 경위에 대해선 밝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