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전 사태 이후 고전했던 국내 일본 화장품 지난해 수입액 전년比 23% 증가
'메이드 인 재팬'인줄 모르고 사는 소비자 많아
가네보 계열 어딕션 인기몰이…루나솔, RMK 매출 2배 넘게 증가
韓 색조 브랜드 취약, 메이크업 시장은 해외 브랜드 점령해
‘제이뷰티(J-Beauty)’의 돌풍이 예사롭지 않다. 2011년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원료의 위험성 때문에 국내 시장에서 부진을 면치 못했던 일본 화장품이 지난해부터 슬그머니 국내 시장에서 매출을 늘려왔다. 특히, 초미립자 파우더 등 뛰어난 기술력을 바탕이 된 색조 브랜드가 인기를 끌고 있다.
특히 드라마 ‘도깨비’에서 유인나가 사용한 어딕션의 ‘치크 폴리쉬’는 한달 넘게 품절 사태를 빚기도 했다. 어딕션은 일본 메이크업 아티스트인 아야코가 2009년 론칭한 브랜드다. 매니큐어처럼 생긴 이 블러셔는 롯데인터넷면세점에 입고될 때마다 매진되고 있다. 신세계면세점에 따르면 이 브랜드 매출은 매달 2배 넘게 늘고 있다. 작년 5월 어딕션을 처음 국내에 들여온 정진 신세계면세점 상품기획자(MD)는 “소비자 반응이 뜨거워 발주 수량을 늘리고 있다”고 말했다.
대한화장품산업연구원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일본 화장품 수입액 규모는 2억961만달러(한화 약 2352억원)로 전년(1억7068만달러) 대비 23% 증가했다. 앞서 일본 화장품 수입액은 2011년 2억2787만달러를 기록한 이후로 매년 10%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터지면서부터다. 2014년은 10년 만에 최저치인 1억6274만달러를 기록했다.
국내에서 유통되는 해외 화장품 중 아직 미국과 프랑스 제품이 각각 점유율 27%, 26%로 일본 화장품(15%)보다는 높지만, 색조 화장품 시장만 놓고 보면 일본이 미국을 앞섰다. 일본 색조 화장품 수입액은 지난해 1962만달러로 미국 색조 화장품(1093만달러)의 두배 수준이다.
◆ 돌아온 제이뷰티의 인기… 신제품 출시 당일 백화점 영업시간 전부터 줄서 기다려
국내에 들어와 있는 일본 업체 중 일본 내 2위 화장품 대기업 가네보 계열 브랜드인 루나솔(Lunasol)과 RMK가 호황을 누리고 있다. 면세점에서만 판매하는 루나솔은 중국인들에게 펄감이 뛰어난 아이섀도우가 입소문을 타며 면세점에서 지난해 129%의 성장율을 기록했다.
같은 기간 RMK는 백화점과 면세점에서 매출이 140% 증가했다. 특히 지난 가을시즌에 내놓은 블러셔 ‘클래식 필름 치크스’ 5종 중 3종은 하루 만에 물량이 동났다. 여름 시즌에 한정 출시한 블러셔 ‘아이스 라일락’도 인기가 뜨거웠다. 출시 당일 제품을 구입하기 위해 몰려든 소비자들이 백화점 영업시간 전부터 줄을 설 정도였다. 이 제품은 판매 시작 두 시간 만에 다 팔렸다. RMK 관계자는 "브랜드 탄생 20주년을 기념해 공격적인 마케팅 활동을 통해 면세점뿐만 아니라 국내 백화점에서도 적극적인 점포 확대 전략을 취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와 같은 트렌드에 힘입어 올해 면세점을 중심으로 여러 일본 브랜드가 런칭할 예정이다. 얼굴을 작게 만들어주는 마사지 크림으로 유명한 SUQQU(스쿠)가 지난 이달 신세계 면세점이 들어섰고, 일본의 인기 메이크업 브랜드 THREE(쓰리)도 고급스러운 무광 케이스와 자연스러운 발색이 돋보이는 색조를 앞세워 다음달 롯데면세점에 첫 매장을 연다.
백화점과 면세점 뿐 아니라 올리브영 등 헬스앤뷰티스토어에서도 일본 화장품은 인기다. 일본 화장품 브랜드 키스미(Kiss me)의 아이라이너는 화장 좀 한다 하는 여성들 사이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 바르기 쉬운 붓펜 타입인 데다가, 0.1㎜ 두께의 극세 브러시라 섬세한 연출이 가능해 큰 인기를 끌고 있다.
◆ 원전 사태 이후 ‘메이드 인 재팬(made in Japan)’ 숨기기…모르고 사는 경우 많아
다만, 소비자 대다수가 해당 브랜드가 일본 제품임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일부 브랜드가 원전 사태 이후 ‘메이드 인 재팬(made in Japan)’을 내세우지 않고 있기 때문. 브랜드 화보에도 일본 여배우 보다는 서양 모델을 기용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방사능 사태 이후로 소비자들이 먹고, 바르는 제품에 대해선 일본 제품을 되도록 쓰지 않으려 한다. 그런데 이 와중에 최근 러쉬코리아에서 일반적인 종이포장지가 아닌 재사용할 수 있는 100% 유기농 면으로 만든 낫랩(knot-warp·엮어서 만든 천 혹은 보자기)으로 비누를 포장해 판매했는데, 이 천에 후쿠시마산 목화솜이 사용됐다는 사실에 소비자들이 크게 분노한 바 있다.
목동에 사는 주부 한영미(36)씨는 “유기농 친환경 제품이라고 광고하면서, 방사능 오염 가능성이 있는 후쿠시마산 원료를 사용했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며 “주부들이 정보를 공유하는 온라인 카페의 글을 보고 이 사실을 알게 됐고, 주변 엄마들 사이에서 한차례 화제가 됐다”고 말했다.
원전 사태 이전, 한국에서 제이뷰티로 국내에서 인기를 끌었던 브랜드는 여전히 고전 중이다. ‘SKⅡ’는 2013년 면세 시장 순위에서 10위권 밖으로 밀려나 지금까지 이름을 올리지 못하고 있다. 이후 동화면세점 온·오프라인 매장을 철수했고, 공식 온라인몰도 중단했다.
다른 브랜드는 SKⅡ보다도 힘든 상황이다. 한국시세이도는 6년째 적자를 내며 자본잠식에 빠졌다. 코스메 테코르테는 서울 소공동 롯데백화점 1층 매장에서 철수했다. DHC는 지난해 홍대, 강남 등에 포진해 있던 직영매장을 철수한 후 주로 온라인몰과 CJ올리브영, GS왓슨스를 통해 판매하고 있다.
후지필름이 만든 안티에이징 전문 브랜드 아스타리프트는 2년 전 국내 사업을 완전히 접었다. 현재는 쇼핑몰들이 재고를 처리 중이다. 오르비스 역시 부진 끝에 한국진출 14년 만에 한국법인을 청산했다.
◆ 기술력으로 韓 틈새시장 파고든 일본 화장품…한국 제품은 일본에서 인기몰이는 중
한편, 한국 화장품은 지난해 일본 수출액 역대 최고치(1억8265만달러)를 기록하며, 일본에서 새롭게 부활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2013년 일본 내 한류가 시들해지면서, 덩달아 한국 화장품의 인기도 떨어졌지만, 지난해부터 ‘쿠션’ 같은 아이디어 상품이 일본에서 호응을 얻고 있다. 양국의 뷰티 브랜드가 서로의 틈새 시장을 찾아 공략한 결과다.
일본 화장품이 국내 시장에서 반격할 수 있는 이유는 ‘기술력’에 있다. 예컨대, 루나솔은 초미립자 파우더로 만든 아이섀도우가 피부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투명한 느낌을 준다. RMK 파운데이션 역시 국내 소비자들 사이에서 촉촉하고 매끈한 발림성으로 큰 화제가 됐다.
뷰티 파워블로거 문유진씨(29·반포동)씨는 “RMK 제품은 베이스 메이크업에 관심 있는 여자들 사이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 꾸덕한 제형에도 불구하고 얇고, 투명하게 발려 마치 쌩얼인데 피부가 좋은 것 같은 연출이 가능하다. 루나솔의 ‘스킨 모델링 아이즈’ 컬러 1호는 유명 뷰티BJ가 ‘인생템’으로 소개하면서 면세점에서 동이 나기도 했다. 요즘 소비자들은 어떤 나라의 제품인지 보다, 얼마나 제품력이 뛰어난지를 더 따진다”고 말했다.
국내 색조 브랜드가 소비자들에게 큰 인기를 끌지 못하는 점도 한몫한다. 백화점 색조 브랜드는 국내외 브랜드의 가격이 비슷하기 때문에, 브랜드의 인지도가 구매와 직결된다. 대학생 정소민씨(23·문래동)는 “스킨케어 제품의 경우 해외 유명 브랜드는 10만원이 넘는 고가가 대부분이라 도저히 살 엄두가 안나, 국내 브랜드숍 제품을 주로 사용하지만, 메이크업 제품은 다르다. 립스틱 하나에 아무리 비싸봤자 3만원 정도이기 때문에, 이왕이면 해외 브랜드를 사는 편이다. 더군다나 여자에게 립스틱은 핸드백처럼 가지고 다니는 패션소품이기 때문에 브랜드가 중요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한 화장품업체 관계자는 “아직까지 국내에는 립스틱 혹은 아이섀도우를 주력으로 하는 색조 브랜드가 인기를 끌지 못하고 있다. 기초 화장품과 달리 색조 화장품은 문화와 스타일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패션산업과 비슷하다. 국내 업체들은 유행을 선도하기보다 해외 제품을 모방한 뒤 저렴하게 출시하는 사업모델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때문에 원전 사태 이후에도 국내 색조 화장품 시장의 지배자는 로레알, 샤넬 등 해외 기업이었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일본 제품은 색상을 부드럽게 표현해줘 한국인들이 선호하는 메이크업에 어울린다는 장점도 있다. 박상아 신세계면세점 뷰티 상품기획자(MD)는 “색감이 강렬하고 섹시한 인상을 강조하는 서양 브랜드에 비해 일본 색조 화장품은 여성스러운 이미지를 앞세워 소비자들이 친근하게 느낀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