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펜' '연필의 힘' '그래, 나는 연필이다'…. 최근 쏟아진 연필 관련 책이다. 지난해 11월 서울에 국내 첫 프리미엄 연필숍이 들어서고, 유명 연필 블로거, 연필로 쓴 잡지, 연필로만 그린 애니메이션이 등장하는가 하면, 진짜 연필 같은 전자 연필까지 출시됐다. 인터넷몰 옥션·지마켓 연필 판매량도 3년 연속 증가 추세. 인공지능 시대, 전통 도구 연필의 복권(復權)이 이뤄지고 있다.

지울 수 있는 자유

사랑은 연필로 써야 한다. 쓰다가 틀리면 지워야 하니까. 연필 마니아로 유명한 헨리 페트로스키 듀크대 석좌교수는 지난 13일 출간된 책 '그래, 나는 연필이다'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쓰고 지울 수 있다는 장점은 창의성과 연결된다. 잘못 써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연필은 펜보다 더 많은 다양성을 지닐 수 있다." 이 같은 평범한 발언이 설득력을 갖는 건, 인터넷 공간에서의 '잊힐 권리' 법제화 논의처럼 영구와 불변에 대한 불안감이 반영됐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일본 회사 파이롯트의 '지워지는 볼펜'이 선풍적 인기를 끈 것도 같은 맥락. '그래, 나는…'을 쓴 박지현 다큐멘터리 감독은 "펜이 서명할 때처럼 마무리 단계에서 주로 쓰인다면 연필은 아이디어를 시작하거나 발전시킬 때 사용한다"면서 "언제든 다시 쓸 수 있다는 심리적 안정감이 사람들로 하여금 연필을 찾게 하는 이유"라고 말했다.

연필 손글씨를 눌러쓰고 있는 잡지 ‘맑은 연필’ 편집장 황성진씨.

깎을 때 되살아나는 나무

서울 명륜동의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연필로 명상하기'의 모든 작품은 연필로 그려진다. 연필 특유의 따뜻한 질감 때문. 올 6·7월에도 극장용 애니메이션 '소나기' '무녀도'가 발표될 예정이다. 출근하자마자 연필부터 깎는다는 안재훈 감독은 "연필을 깎으면 삼림욕하듯 나무 향을 들이마실 수 있다"면서 "수건으로 항아리 닦듯 마음을 다스리는 시간"이라고 말했다.

연필 부스러기마저 눈을 치유한다. 일본 디자이너 하루카 미사와(36)가 제작한 '연필꽃'은 최근 인스타그램에서 큰 화제가 됐다. 여러 색깔이 들어간 종이 연필을 연필깎이로 돌려 깎아 알록달록한 '꽃잎'을 만들어낸 것이다. 연필 부스러기가 낱개의 벚꽃잎처럼 보이도록 제작된 분홍색 '벚꽃 연필'은 2015년 일본에서 먼저 나왔다가 소문을 타고 최근 국내에서 인기리에 판매되고 있다.

①일본 디자이너 하루카 미사와의 ‘연필 꽃’ 작품. ②일명 ‘벚꽃 연필’. ③3스도쿠 전용 연필.

명상으로서의 연필

직접 연필을 쥐어 손글씨를 눌러쓴 잡지도 있다. '맑은 연필'은 회당 12권만 만들고, 서점에 납품된 책이 다 팔려야만 다시 제작에 착수한다. 2013년 12월 이 프로젝트를 처음 시작한 디자이너 황성진(37)씨는 "느린 작업이지만 손으로 쓴 연필 글씨가 독자에게 속도에서 벗어나는 여유를 주는 것 같다"고 말했다. 연필의 재발견을 촉발한 최근 필사·색칠책 열풍도 마찬가지. 필기류 블로그 '아이러브펜슬'을 운영하는 조세익(36)씨는 "좋은 필기류가 넘치는 요즘, 기록 도구로서의 연필은 무용(無用)한 듯 보일 수 있다"면서도 "한번 쥐면 무아지경으로 뭔가를 계속 쓰고 그리게 하는 필기감이 스트레스 해소를 돕는다"고 말했다.

수집의 기쁨… 실속형 가치 소비

지난해 11월 서울 구로동에 프리미엄 연필 편집숍 '흑심'을 차린 디자이너 백유나(28)씨는 "울산이나 경기도 파주·일산 등에서도 손님이 찾아온다"면서 "빈티지 연필이나 독특한 디자인 연필을 소장하려는 마니아가 많다"고 말했다. 이곳엔 '금괴 연필' '스도쿠용 연필' '담배 연필' 등 전 세계에서 수집한 이색 연필 80여 종이 구비돼 있다. 30만원대 독일 파버카스텔 백금 도금 연필 등 예외도 있지만, 대부분 자루당 1만원 이내로 구할 수 있다. 제일 싼 건 1400원. 독일 연필 회사 스테들러도 프리미엄 연필을 1만원에 판매하고 있다. 스테들러 관계자는 "큰돈 들이지 않고도 자신의 취향을 충족시키는 가치 소비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아날로그, IT를 변화시키다

연필의 상승세에 디지털도 반응하고 있다. 삼성전자가 프리미엄 태블릿 PC 신제품을 공개한 지난달, 정작 주목받은 건 연필이었다. 일명 'S펜'으로 불리는 화면 터치용 펜인데, 스테들러와 협업해 외관뿐 아니라 나무와 플라스틱의 혼합 소재로 만들어져 진짜 연필을 쥐었을 때 촉감을 똑같이 구현해냈기 때문이다. 미국 IT 전문 매체 더버지는 "애플 제품보다 5000배쯤 멋지다"고 극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