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인 피의자 신분이 된 박근혜 전 대통령이 21일 서울중앙지검에 출석했다. 지난해 9월 시민단체 투기자본감시센터가 고발장을 낸 지 174일째 만이다.
검찰 특별수사본부(본부장 이영렬 서울중앙지검장)는 이날 오전 9시 30분부터 박 전 대통령을 피의자 신분으로 불러 조사하고 있다. 박 전 대통령은 오전 9시16분쯤 서울 삼성동 사저를 나서 검은색 에쿠스 차량을 타고 서초동 검찰청사에 도착했다.
오전 9시 24분쯤 포토라인에 선 박 전 대통령은 예고한 대국민 메시지를 따로 낭독하지는 않았다. 박 전 대통령은 “국민여러분께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성실하게 조사에 임하겠습니다"라고 짧게 말한 뒤 청사 내부로 들어갔다. 현장에서는 취재진과 경호인력, 검찰 관계자 등 200여명이 박 전 대통령을 지켜봤다. 서울중앙지검 주변에서는 25개 중대 2000여명의 경찰 병력이 삼엄한 경비를 이어가고 있다.
◆ 朴 특수부 조사실서 대면조사
박 전 대통령 조사는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가 사용하는 10층 1001호 조사실에서 진행된다. 특수부 검사실과 1002호 휴게실을 지나 오른쪽 복도 끝에 자리 잡은 방이다. 박 전 대통령은 조사실 가장 안쪽에 자리잡은 책상에서 수사진과 마주앉게 된다. 출입문 바로 앞 책상에 변호인이 입회해 박 전 대통령을 돕게 된다. 조사과정에는 부장검사와 검사 각 1명이 배석한다. 조사실과 휴게실이 맞닿은 벽면에 소파, 탁자가 마련됐으며 휴게실에는 응급용 침대도 구비됐다. 다만 화장실은 실내에 따로 없어 복도에 있는 일반 화장실을 이용해야 한다. 박 전 대통령 측의 거부로 영상녹화는 하지 않기로 했다.
이날 검찰은 외부인·차량 출입을 전면 통제했다. 취재진 등 사전에 출입이 허용된 사람만 청사 정문에서 신원확인 뒤 비표를 받아 검색대를 거쳐 경내로 진입할 수 있다. 이영렬 본부장은 꼭 필요하거나 시간을 다투는 조사가 아닌 이상 피의자·참고인 등 수사 관계자의 청사 출입도 자제토록 당부했다. 박 전 대통령 조사가 이뤄지는 영상녹화실이 위치한 청사 10층은 사실상 ‘1인 조사실’이 될 전망이다.
박 전 대통령은 본격적인 조사에 앞서 조사실 옆 휴게실에서 노승권 서울중앙지검 1차장검사(검사장급)와 10분 가량 티타임을 가졌다. 이영렬 본부장과 함께 특수본을 지휘하는 노 차장은 박 전 대통령에게 조사일정과 진행방식을 개괄적으로 설명하며 진상규명을 위한 협조를 요청했다. 티타임에는 변호인도 동석했다.
◆ 검찰, 한웅재·이원석 부장검사 2명 투입···조사분량 방대
박 전 대통령은 직권남용, 강요 및 강요미수, 공무상비밀누설, 뇌물수수 등 혐의를 받고 있다. 검찰과 박영수 특별검사팀 수사결과를 종합하면 박 전 대통령은 비선실세 최순실씨가 설립·운영에 관여한 미르·K스포츠재단이나 더블루K 등 개인회사를 지원하고, 최씨 측에 각종 국정비밀을 건넸다. 청와대 비서진은 최씨가 민간기업 인사·이권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동원된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특검은 박 전 대통령이 최씨와 함께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를 지원하고 그 대가로 재단 출연금 포함 433억원대 뇌물을 받은 혐의도 적용했다. 그 밖에 문화·예술계 편파지원, 비선의료진 불법특혜 등 전체 범죄사실은 총 13가지에 이른다.
검찰은 특검 이전 1기 특수본에서 재단 설립 과정을 파헤쳤던 한웅재 형사8부장과 특별수사 경험이 풍부한 이원석 특수1부장을 투입해 박 전 대통령을 조사한다. 한 부장이 배석검사 1명, 참여수사관 1명과 함께 오전 조사를 시작했다. 조사진행 경과에 따라 한 부장과 이 부장이 역할을 바꾸게 된다.
검찰은 100여쪽 안팎 수백여 신문사항을 준비했다. 조사과정에는 변호인 1명이 배석해 박 전 대통령을 돕게 된다. 대변인격인 손범규 변호사 등 9명의 변호사가 선임계를 낸 가운데 유영하·정장현 변호사가 전날 삼성동 사저를 찾아 변론 준비상황을 최종 점검했다. 먼저 입회한 유 변호사와 정 변호사가 차례로 번갈아 참여하게 된다. 손 변호사와 서성건·이상용·채명성 변호사도 대기하고 있다.
조사할 분량이 많은 만큼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조사시간은 10시간을 훌쩍 넘길 것으로 전망된다. 전직 대통령에 대한 검찰 수사는 전두환·노태우·고(故)노무현 전 대통령에 이어 네 번째로 가장 최근인 2009년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의 노 전 대통령 대면조사는 13시간 가량 소요됐다.
법조계 안팎에서는 최순실씨 등 핵심 피의자와의 대질조사 가능성도 거론된다. 그러나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의 업무수첩, 정호성 전 청와대 부속비서관의 녹음파일 등 수집된 물적 증거가 방대하고, 박 전 대통령이 앞서 기소된 주요 피의자들의 범죄사실 개요를 숙지했을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대질 신문의 실효성이 낮다는 평가가 나온다. 검찰 관계자도 “만반의 준비를 다 하겠지만 가능성이 낮다”고 말했다.
◆ 朴 혐의 부인 전망···구속영장 청구 여부 관심
박 전 대통령은 혐의 전반을 부인할 것으로 관측된다. 박 전 대통령은 그동안 대국민 담화, 팟캐스트 인터뷰, 헌법재판소 파면 결정 이후 간접 발표한 입장 등을 통해 일관되게 무고를 주장했다. 재단 설립은 ‘창조경제·문화융성’ 등 국정 수행 차원에서 선의로 이뤄졌으며, 비선실세의 사익추구는 본인은 모르는 일이라는 취지다. 검찰과 특검 수사에 대해서도 정치적 중립성 운운하며 문제삼아 왔다. 김수남 검찰총장, 박영수 특별검사는 박 전 대통령 본인이 임명했다.
검찰은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조사내용을 토대로 사실관계를 다듬은 뒤 법리검토에 집중할 방침이다. 특히 재단 출연금의 성격 관련 재계의 지위를 두고 검찰은 피해자, 특검은 뇌물공여자에 무게를 둬 왔다. 검찰이 박 전 대통령에 대해 최종 적용할 혐의가 출연 기업들의 명운을 가르게 된다.
보강수사 차원에서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등 재계 총수들에 대한 추가 소환조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검찰은 지난 15일 박 전 대통령에 대해 소환조사 통보 이후 최태원 회장 등 SK그룹 관계자, 장선욱 롯데면세점 대표(부사장) 등 롯데그룹 관계자를 불러 조사했다. 롯데 신동빈 회장 소환도 유력하게 점쳐졌으나 전날 서울중앙지법에서 롯데그룹 경영비리 관련 공판이 열리는 등 시일이 촉박했다.
검찰은 총수 사면이나 면세점 인허가 등 각 그룹 현안을 둘러싸고 박 전 대통령 측과 거래가 오갔을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박 전 대통령이 그동안 침묵·부인으로 일관해 온 데다 청와대에서 이뤄진 조직적 증거인멸 정황, 본격적인 대선일정을 앞두고 검찰이 떠안을 수사 장기화 부담 등을 감안할 때 핵심 피의자인 박 전 대통령에 대해 구속수사를 추진할 수도 있다. 다만 전직 대통령 신분으로 도주를 예상하기 힘든 점, 최순실씨, 이재용 부회장, 김기춘·안종범·정호성 등 청와대 관계자를 비롯한 주요 공범 혐의자들이 이미 구속된 점 등에 비춰 불구속 상태로 재판에 넘기는 선택지도 열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