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덕 문화부 차장

인사가 늦었수. 혁이 에미, 고말복이외다. 다짜고짜 보자 하여 결례인 줄 아오만, 늦출 일도 아닌지라 고집을 피웠수다. 세상이 다 아는 두 사람 연애담을 이 늙은이가 이제사 알게 됐지 뭐유. 시국이 좀 시끄러웠어야지. 6·25 동란 때도 이리 살벌하진 않았다오. 총만 안 들었지 서로를 매국노입네, 부역자입네 싸워들 대니 공연히 봉변이라도 당할까 무서워 대문 밖으론 일절 걸음을 안 했다오.

한데 봄바람을 타고 어디서 해괴한 소식이 들립디다. 우리 아들이 사랑에 빠졌다는군요. 처음엔 군대 간 우리 큰 손주가 그랬다는 줄 알고 혀를 찼지요. 나라는 안 지키고 웬 연애질인가 하여. 근데 옆집 심퉁 할멈이 "당신 손주 아니고 당신 늙은 아들이라니까~아!" 하는 거요. 입이 딱 벌어지고 심장이 벌렁거리는데, 하마터면 그날로 저승 갈 뻔했지 뭐유. 키만 멀대같이 크지, 죽은 지 애비 닮아 광대뼈는 툭 튀어나오고 등은 구부정한 것이 딱 시들어가는 거북이 상이거늘, 시퍼런 처자식 놔두고 낮도깨비처럼 얼어 죽을 연애라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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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는 마슈. 나도 앞뒤 꽉 막힌 할망구는 아니라오. 세상에 사랑만큼 아름다운 게 어디 있소. 셰익스피어도 말했지요. 사랑의 힘은 태산보다 강하고 황금보다 빛난다고. 물론 이런 말도 했다우. 사랑은 짐승을 인간으로 만들기도 하나, 인간을 짐승으로 만드는 것도 사랑이라고! 하여, 산고 끝에 아들 하나 겨우 얻어 금이야 옥이야 키워온 내가 한 말씀, 아니 100% 사실만 전달하는 것이 어미의 도리이자 그대의 알 권리이며 피차 불행한 파국을 맞지 않는 최선책이 아닌가 작정한 것이오.

십중팔구 그대는 도통 말이라곤 없고 세상사엔 무심해 보이는 내 아들이 마음에 쏙 들었을 거외다. 고뇌하는 지식인 상이랄까. 지 애비 별명이 '천하제일개폼'이었으니 그건 타고났다고 봐야 하오. 뭘 묻거나 흐벅진 농담을 해도 먼 산을 보거나 코를 만지며 머쓱히 웃기만 하지요? 그건 신중해서가 아니라 말귀를 못 알아들었거나, 정답을 모르거나, 아예 딴생각을 할 때 나오는 반응이오. 전화도 잘 안 받아서 안달복달하게 만들지요? 이는 밤새 술독에 빠졌다가 약정한 지 3개월도 안 된 휴대폰을 길바닥에 떨구고 온 날이라오. 입맛도 우사인 볼트 100m 기록만큼이나 짧은데 눈치채셨는지. 김치는 이제 막 양념에 치댄 생김치라야 먹고, 라면은 살짝 덜 익힌 알덴테(al dente)로만 삶아야 하는 데다, 계란말이엔 반드시 김 두 장을 얹어야 한다우. 몸은 또 얼마나 아끼는지. 여름만 되면 풍욕을 한답시고 벌거벗은 몸으로 베란다 앞에 가부좌를 트는 통에 건너 동에서 신고 들어온 게 한두 번이 아니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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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론은 이제부터요. 위로 누나만 넷인데, 그중 둘째가 성질 고약하기로 소문 자자하다우. 처가에 볼모 잡혀 사는 게 숙명인 이 시대에 정통 시집살이의 서슬이 얼마나 준엄한지, 시누이의 당찬 기개가 무엇인지 매일매일 업데이트해 보여주는 우리 집안 군기반장이랄까. 혹시 내 아들 직업이 뭔지는 아시우? 어느 땐 작가였다가, 어느 땐 감독이고, 또 어느 땐 직원 하나 없는 사장이 돼 있더이다. 가장 최근 가져온 명함엔 무슨 무슨 매니저라고 영어로 거룩하게 적혀 있습디다만. 분명한 건 한류라는 이름의 막차에 올라탔다가 한한령에 쫓겨오면서 코딱지만 한 지 애비 유산을 홀랑 날려 먹었다는 사실이지요.

그 파란의 인생을 뒤치다꺼리하며 살아온 여인이 있으니 내 며늘애올시다. 스물다섯 뽀송뽀송한 나이에 당신처럼 코가 꿰고 눈이 멀어 왔더이다. 내 아들 진면목을 하루하루 신대륙 발견하듯 경이롭게 목격하면서도, 마늘 먹는 웅녀처럼 묵묵히 참아내는 것이 어찌나 신통하던지. 고비 때마다 거꾸로 이 늙은이를 위로합디다. 물집과 굳은살들의 시간이 모여 사랑이 다져지고, 뒤척이고 훌쩍이는 밤들이 모여 인생을 만드는 거라고. 특별히 이쁜 구석 없으나, 남의 것이다 싶으면 욕심부터 내고 보는 종자들과는 차원이 다른 '걸작'이라오. 당신이 상대할 체급이 아니란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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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섭하시우? 하지만 오랜 시간 흐르면 내게 엎드려 절하고 싶을 날 올 거유. 한창나이 때 늙은 남편 병수발이나 하게 될 운명 막아준 것만 해도 어디유.

할 수만 있다면 죽기 전 베네치아라는 곳에 가보고 싶구려. 그 찬란한 물의 도시엔 머물지 않고 부유하는 삶들이 태반이라지요. 거기서 생을 마쳤다는 페기 구겐하임이라는 여자의 무덤에도 가볼까 하오. 모든 남자를 사랑했으나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한 여자. 개들과 함께 묻혔다는 작은 무덤에 꽃 한 송이 얹어주며, 다시 태어나면 변심 따위 개나 물어가라 외치는 상남자, 지조 있고 기개 어린 남자를 만나라 빌어주고 싶소이다. 요즘은 희귀종 된 진짜 사내를 말이오, 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