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자동차 회사 도요타는 지난해 파격적인 재택근무제도를 도입했다. 일주일에 2시간만 회사에 나오고 나머지는 집에서 일하는 제도다. 대상은 사무직과 연구개발(R&D) 담당 기술직 등 2만5000명으로, 전체 직원 7만2000명 중 3분의 1에 해당한다. 도요타 관계자는 "무슨 요일 몇 시부터 몇 시까지 근무하라고 회사가 일률적으로 정하지 않고, 팀·부서별로 개개인의 사정을 고려해 가장 효율적인 업무 방식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했다.

여직원들도 아이를 낳은 뒤 2년간 출산·육아휴직을 할 수 있다. 복직 후에도 아이가 초등학교 4학년이 될 때까지는 탄력적으로 근무시간을 조정할 수 있다. "그래도 회사가 돌아가느냐. 혹시 불이익은 없냐"고 묻자 도요타 도쿄 본사 직원 사토 게이코(佐藤惠子)씨는 긴말 안 했다. "우리 팀 상사도 여자인데, 육아휴직 다 쓰고 탄력근무 하면서 작년에 승진했어요."

일본 주부 유코 나가이(오른쪽)씨가 집에서 컴퓨터로 일을 하는 모습. 급속한 노령화로 직장에서 일할 사람들이 줄어들자 일본 정부는 재택근무와 탄력근무제 등을 확대해 여성 등이 일할 수 있는 기회를 확대하고 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2015년 '아베노믹스 2탄'이라며 강력하게 추진 중인 정책이 '1억 총활약 사회'와 '일하는 방식 개혁'이다. 탄력근무·재택근무제 확산, 육아휴직 확대 현황을 총리관저가 직접 챙긴다. 아베 총리는 "야근을 월 100시간 미만으로 줄이라"고 재계와 노동계를 압박해 지난 13일 재계단체인 게이단렌(經團連)과 일본노동조합총연합회가 이를 받아들였다.

아베 총리는 왜 경제를 살리겠다면서 기업들 보고 "직원들 일 그만 시키라"고 요구하는 걸까. 이종윤 한국외대 명예교수가 "일본은 이미 고령화로 일손 부족을 겪고 있다"면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일할 수 있는 사람은 끝까지 일터에 붙들어 두고, 부모 모시거나 애 키우느라 일 그만둔 사람을 다시 일터로 불러내야 한다"고 했다. 정년을 연장해 건강한 사람은 최대한 오래 일하게 하면서, 동시에 탄력근무제를 도입해 노부모 모시는 중·장년과 아이 키우는 젊은 직원의 숨통을 터주겠다는 발상이다. 류재광 삼성생명 은퇴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이 발상 속에 일본 사회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깨달은 교훈이 압축돼 있다"고 했다.

'잃어버린 20년' 막바지에 일본 사회에서는 미팅 붐이 일었다. 일본 정부·지자체·기업이 저출산을 해결하겠다며 너도나도 젊은이들의 미팅을 주선했다. 하지만 애써 결혼을 시켜도 여전히 신혼부부 대다수는 애를 안 낳거나 하나만 낳았다. 또 산업 현장에서는 한참 일할 40~50대가 노부모 병시중을 드느라 해마다 10만명씩 직장을 그만뒀다. 결국 일본 사회가 도달한 결론이 '각자 사정에 따라 가족을 돌보면서 수입도 계속 올릴 수 있도록 일하는 방식을 바꾸자'였다.

김규판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일본팀장은 "일본 경제가 살아날지 여부는 고령화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했다. 일본은 75세 이상 후기 고령 인구가 1610만명인데, 이들을 부양할 자식 세대(45~65세)는 3250만명뿐이고 밑으로 내려가면 그 숫자가 더 줄어든다. 이 문제를 어떻게 푸느냐에 따라 아베노믹스가 성공작이 될지 반짝하고 주저앉을지 결판이 난다.

이에 따라 일본 정부는 기업과 수시로 접촉해 일하는 방식 개혁을 촉구하고 있다. 투자 지원 등 당근도 마련하고 있다. 기업들도 생산 가능 인력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도록 아이디어를 짜내고 있다. 그 덕분에 탄력근무제를 도입하는 회사가 도요타 하나에 그치지 않고 업계로 계속 확산되고 있다. 도요타에 이어 소비재 생산 업체 유니레버 재팬도 전 사원 500명 중 400명을 대상으로 근무시간은 물론 근무 장소까지 마음대로 선택하는 '자유시간 재택근무제도'를 도입했다. 후지쓰는 올 4월 전 사원을 대상으로 재택근무를 실시한다. 혼다·미쓰이물산·이토추상사 등도 비슷한 제도를 시험 중이다.

일본 정부가 최근 '덴쓰 사건'을 엄벌한 것도 기업에 확실한 메시지를 던졌다. 덴쓰 사건이란 아베 총리가 막 '일하는 방식 개혁'에 시동을 걸 때, 일본 최대 광고회사 덴쓰 신입 사원이 과로 우울증으로 자살한 일을 가리킨다. 아베 총리는 격노했다. 정부는 도쿄노동기준감독서 조사관들을 대거 덴쓰에 투입해 실태 조사를 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