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석조 국제부 기자

얼마 전 독자로부터 "사우디아라비아 왕실의 ○○○가 유력 왕자인지 아닌지 알려달라"는 내용의 이메일을 받았다. 난처했다. ○○○는 한 한국 상장업체와 깊게 연계된 인물이었다. 이메일을 통해 개인적으로 알려줘도 그에 대한 평가가 주식 투자에 반영되거나 소셜미디어 등으로 유포될 수 있었다. 한국에서 당선 가능성이 큰 대선 후보 관련 정보가 테마주의 단초가 되는 것과 비슷하다. 왕정 국가 사우디에선 왕위 계승과 그에 따른 왕세자 책봉 등 왕실 정치 지형에 따라 테마주가 만들어진다. 1만5000명에 달하는 사우디 왕자·공주 가운데 누가 얼마나 권력 핵심과 가까운지 안다는 건 금맥 지도를 보는 것과 같다.

'아라비아 반도의 금맥'을 찾아나서는 사람이 이처럼 생겨난 건 10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사우디 왕위 계승이 2015년에 이뤄졌기 때문이다. 살만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는 국왕에 오른 뒤 전통에 따라 남동생을 후계자로 책봉했다가 이내 폐위하고 자신의 조카와 아들을 왕세자와 부왕세자로 각각 임명했다. 작년 8월엔 10년 넘게 자리를 지킨 석유장관 알리 알나이미도 교체해 국제 석유 시장을 출렁이게 했다. 지난 2년간 세계 각국이 서둘러 외교 사절단을 꾸려 사우디를 오가고 정상급 방문을 추진한 것도 세계 최대 산유국 사우디의 새 왕실과 커넥션을 구축하기 위해서였다.

아시아 국가를 순방 중인 살만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맨 앞쪽) 사우디아라비아 국왕이 지난 1일(현지시각)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의 할림 페르다나쿠수마 공항에 전용기 편으로 도착, 금빛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오고 있다.

외국 손님은 많이 받지만, 살만 국왕은 웬만해선 나라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82세 고령인 데다 알츠하이머 초기 증세가 있다는 설이 돌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다. 앙숙인 이슬람 시아파 세력의 암살 위협도 그의 발을 잡는다. 그런 살만 국왕이 지난달 26일 한 달 일정으로 아시아 6개국 순방길에 올랐다. 왕자 25명과 장관 10명이 방문국에서 풀 수십억달러의 투자 보따리를 잔뜩 챙겨 동행했다. 뉴욕타임스는 "살만 국왕이 꾸린 아시아 순방단의 규모가 이례적으로 크고 화려하다"면서 "저유가 시대에 대비해 아시아와 경제협력 관계를 더욱 강화하려는 의도"라고 했다.

살만 국왕은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브루나이에 이어 12일 일본을 방문했고 15일 중국을 찾는다. 사우디 국왕의 일본 방문은 46년 만이고, 중국은 11년 만이다. 우리나라는 최규하·노무현·이명박·박근혜 등 대통령 4명이 사우디를 찾았지만, 사우디 국왕이 온 적은 없다. 외교 소식통은 그가 이번에 꼭 한국을 방문하고 싶어 했다고 한다. 그가 다른 형들에 밀려 왕위 계승권 없는, 속칭 '주가 낮은 왕자'이던 1999년 방한했다가 한국의 발전상에 감명받아 왕이 되면 꼭 다시 찾고 싶어 했다는 것이다.

살만 국왕의 방한 무산은 그가 한국을 중요한 나라로 여기지 않아서가 아니라 탄핵 사태에 휩쓸린 우리 상황이 그를 받을 형편이 못 됐기 때문이다. 살만 국왕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사우디에 일본을 위한 경제특구를 설치하기로 합의했다는 소식을 듣고 아쉬운 마음을 누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