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병현 미래전략실장

요즘 서울 시내 주요 호텔과 회의장에서 4차 산업혁명 관련 행사를 흔하게 볼 수 있다. 지난해 초 다보스 포럼에서 4차 산업혁명론이 나온 이래, 4차 산업을 배우려는 한국의 학습 열기는 단연 세계 최고다. 빠른 추격자(fast follower)로서 성공 경험이 많은 한국 현실에서 이런 학습 붐은 늘 자연스럽다.

그런데 콘퍼런스에 가면 논리 전개와 결론이 뻔하다. 발표자는 먼저 개념, 역사, 해외 사례 등 관련 지식부터 장황하게 설명한다. 이어 규제가 인공지능 등 주요 4차 산업을 얼마나 옭매는가를 역설하고, '시간이 없다. 빨리 규제를 확 풀어 선진국을 따라잡자'면서 결론을 맺는다.

그런데 선진국은 과연 산업 구조를 바꾸는 신기술에 늘 관대할까. 실제는 그렇지 않다. 개인 정보 보호, 생명, 국방 등 주요 분야에 대한 선진국의 규제 벽은 높다. 규제 벽을 낮췄더라도 기본 규칙을 어길 경우 가혹하게 다룬다. 규제에 관대한 대상은 패러다임을 바꾸는 첨단 기술이거나 글로벌 독점력을 확보할 수 있는 원천 기술이다.

원천 기술 개발에 취약한 추격자 국가는 선진국 기술을 수입하여 응용 제품을 재빨리 싸게 만들어야 먹고살 수 있다. 이처럼 산업화 속도를 요구할 경우 규제는 언제나 핵심 변수다. 규제 자체가 추격 속도를 떨어뜨리고 원가를 높이기 때문이다.

실제 한국은 산업화 과정에서 시민사회의 규제 요구를 권위주의로 억누름으로써, 추격자 모델을 효율적으로 작동시켰다. 하지만 1987년 이후 탈권위주의화에 따라 규제 양산은 자연스러운 정치 현상이 됐다. 특히 5년 단임제와 대의 민주주의 체제는 표심 따라 규제를 쏟아낼 수밖에 없고, 낡은 규제도 유권자 눈치를 보느라 과감하게 없애지 못한다.

이제 한국 산업계 리더들은 규제 타령을 그만하고 현실적 타개책을 찾아야 한다. 즉, 규제를 상수(常數)로 놓고 4차 산업혁명에 응전하는 전략을 짜야 한다. 이를테면 현존하는 각종 규제를 우회하거나 뛰어넘는 제품이나 서비스를 만드는 데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복잡하고 까다로운 규제야말로 파괴적 혁신 기술을 낳는 토양이 될 수 있다.

삼성전자의 삼성페이는 규제 우회 전략으로 성과를 거둔 사례다. 한국의 온라인 금융거래는 온갖 규제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규제 백화점'이다. 온라인에서 물건을 사려면 신용카드 번호, 생년월일, 본인 인증 등 각종 정보를 일일이 써 넣어야 하고, 절차도 복잡하다. 삼성페이는 스마트폰에 신용카드를 등록해놓고 지문으로 인증하는 방식으로 이런 절차를 확 줄였다.

한국 사회에서 발상 전환을 해야 하는 규제 백화점은 수두룩하다. 국민건강보험이 보유한 각종 자료는 양질의 의료 빅 데이터로 평가받는다. 누군가가 각종 규제를 돌파해서 이 데이터를 활용하는 방안을 고안하면, 세계 최고의 디지털 헬스 인프라를 만들 수 있다.

빠른 추격자에서 최초의 선도자(first mover)로 변신하자는 말은 멋지지만 현실에선 구두선(口頭禪)이다. 크기가 어정쩡한 내수 시장을 고려하면 추격자 모델이 우리에게 현실적 선택일 수밖에 없다. 규제 제조창인 정부와 국회에 4차 산업의 명운을 맡기지 말고, 산업계가 규제를 무력화하는 '추격자 2.0' 모델을 만들어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보자.